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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산책자]소중한 ‘나’

opinionX 2019. 1. 14. 14:08

1월 중순이 되도록 눈이 없는 겨울인지라 충청북도 깊은 산골의 산들은 메마르고 쓸쓸했다. 산으로 둘러싸인 시골 기차역 플랫폼은 바람이 휭휭 불어 더 황량했다. 1박2일의 여행을 함께하고 집으로 가는 청량리행 무궁화호를 기다리며 일행 한 명이 긴 한숨을 섞어 말했다. “앞으로 세상은 어떻게 될까요? 이 정도만 살고 아침에 눈 뜨지 말고 그냥 죽었으면 좋겠어요.” 짧은 여행, 긴 대화 끝에 내린 무슨 결론 같았다. 다른 일행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고통 없이 그냥 마칠 수만 있다면 저도 딱 그래요.” 50대 초반의 한 언론사 부장과 60대를 바라보는 번역가가 서로에게 동의했다.

우리는 해마다 1월이 되면 무슨 행사처럼 1박2일 산행을 하며 서로의 얼굴을 확인한다. 천문대가 있는 소백산에 올라 찬바람을 맞으며 눈밭 위를 걷고 운이 좋으면 별을 본다. 그곳에서는 진짜 칠흑의 밤, 별밖에는 빛이 없는 밤하늘을 만날 수 있다. 내 속셈이야 사실은 한갓진 곳에서 훌훌 일상을 털고 술이나 실컷 마시고 오는 데 있었지만, 이번에는 웬일인지 목적지를 오가는 동안 심각한 이야기가 줄곧 이어졌다. 플랫폼들이 집어삼키고 있는 경제, 자본주의 탈출, 젊은 세대들의 박탈감, ‘미투’와 워마드, 안티페미니즘과 백래시, 피해자 담론, 소확행, 스카이캐슬과 입시…. 기대했던 눈을 만나지 못해 우리는 미세먼지 가득한 저 아래 세상의 공기를 높은 산까지 끌고 왔나 보다. 산에서 본 아랫동네는 아닌 게 아니라 미세먼지가 뿌연 층을 만들고 있었다. 

다들 벗어나고 싶어 했다. 한 사람은 아무 데나 마당이 있는 집으로 퇴거해 말년을 보내고 싶어 했고, 한 사람은 어서 봄이 와서 텃밭 일을 다시 시작하기만 기다렸다. 전라남도 외진 지역에서 작은 문화 공동체를 꾸려가는 스님은 지역이 이대로 살아있기만을 기대했다. 더 큰 꿈은 없었다.

성정이 조금 비뚤어진 나는 그들 앞에서 ‘문화자본’이며 ‘상징자본’을 운운하면서 소로와 스콧 니어링의 ‘월드니즘’(Waldenism)이 숨기고 있는 위선을 들먹였다. 그들조차 사실은 친구들이 마련한 강연과 원고료의 도움으로 시골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고, 문화적이고 정치적인 교양을 내 작은 삶에서 실현하려는 몸짓조차 어쩌면 소부르주아들의 위선일 수 있다고. 피에르 부르디외는 비슷한 취지로 말했다.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자존심에 대한 요구도 지속적 미래를 기대할 수 있는 소부르주아에게나 중요한 의미를 가질 뿐, 프롤레타리아에게는 생존과 관련해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는 덕목이라고. 

문화와 교양을 이마에 붙인 사람들이 아니더라도 소부르주아의 욕망은 흔하게 만날 수 있다. 2018년 출판 트렌드를 분석한 이런저런 보고서들에서 하나같이 꼽은 키워드가 ‘소확행’이며 ‘나’ 열풍이었다.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곰돌이 푸,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 베스트셀러에 오른 책들의 상당수가, 타인에게 피해 보지도 주지도 말고 나만의 작은 행복을 지키며 살라고 말하고 있었다. 약탈적 자본주의, 사회적 불평등, 민주주의의 세계적 퇴조 같은 거대 담론은 이해할 수도 해결할 수도 없는 바깥세상의 일이고, 창문도 없는 쪽방 속의 삶들은 내 눈에는 가려진 이 사회의 잔여물이다.

이런 세상에서 내가 안전하게 나 자신을 위치시킬 수 있는 곳은 ‘피해자’의 자리이다. 선량한 개인으로 큰 탐욕 없이 살고자 하는 내가 왜 손해를 보아야 한다는 말인가. 내가 원하는 것은 10평 원룸이라도 따스한 햇볕이 드는 창가에서 조는 고양이와, 신선한 치즈샐러드 접시와, 영화 예매권 몇 장과, 최소한의 월급통장뿐인데. 그러므로 내가 행여 누가 나에게 상처라도 주지 않을까 눈을 번득이며 피해자 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산다 해도 그다지 잘못된 건 아니다. 이렇게 하여 ‘소확행’의 이데올로기와 피해자 담론은 단단히 결합한다. “나는 나 외에 더 이상 이 사회에 대해 갚을 게 없다.”

그러나 이 최소한의 것조차 그런 것을 추구할 수 있는 조건은 아무한테나 주어지지 않는다면? 적게 먹고 적게 싸겠다는 ‘안분지족’은 예부터 조금이라도 더 가진 자들의 이데올로기였고, ‘청빈’은 그들을 치장하는 수사였다. 왜냐하면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자들이나 이제 시작하는 자들에게는 끝없는 포기만이 기다리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소확행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삶 역시 그들이 피해자를 자처하며 그대로 있다가는 차츰 추락할 것이다. ‘소중한 나만의 행복’은 지금의 세상, 기업, TV, 미디어가 바라는 최면제 혹은 마약일 따름이다. 소확행, 그런 것은 없다.

<안희곤 | 사월의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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