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지난해 여름 무렵이었다. 점심시간 직후, 식곤증이 내려앉은 조용한 편집국에 불쑥 낯선 남성이 들어왔다. 그는 일말의 쭈뼛거림도 없이 사회부 쪽을 향해 직진해왔다. 

“어, 여기 막 들어오시면 안됩니다!” 출입증 없이 1층 로비를 무단으로 통과해 올라온 그를 악성 민원인이나 영업사원쯤으로 여긴 누군가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저는 해고노동자입니다. 제보를 하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단정한 셔츠 차림에 두툼한 서류봉투를 한 손에 끼고 있던 그는 아무런 동요가 느껴지지 않는 침착한 표정으로 말했다. 

‘잡상인’으로 오해를 받게 한 것이 미안해져 안쪽 회의실로 모시고 갔다. 테이블을 두고 마주 앉은 그는 서류봉투에서 주섬주섬 두꺼운 종이뭉치를 꺼냈다. 종이에는 그가 노조 설립을 시도한 순간부터 시작된 사측의 탄압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겉으로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기사화가 쉽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약 28년 전 벌어진 일이었다. 그의 말이 거짓일 것이라 단정한 것도 아니었고, 심각하지 않은 문제라 여긴 것도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당장 산적해 있는 수많은 현안들을 떠올린 순간, 그의 오래된 이야기는 내 머릿속 우선순위에서 저 뒤로 밀려났다. 

“말씀 잘 들었습니다. 주신 자료는 저희가 검토한 후 기사화하게 되면 다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일어나려는 찰나, 그는 자료를 복사해 가져가면 안되겠냐고 물었다. 하기야 여러 언론사를 돌며 제보를 할 때마다 그 두꺼운 자료를 원본으로 주려면 복사비용만도 만만치 않게 들 것이다. 그렇게 복사한 자료는 내 책상 한구석에 다른 서류들과 함께 놓였고, 그 뒤 다시 들춰지지 않았다. 나는 곧 그의 이름을 잊었다. 

그래서 처음엔 몰랐다. 50일 넘게 철탑 위에서 단식투쟁을 하며 몸무게가 30㎏ 가까이 빠지고 오른쪽 반신마비 증세까지 나타났다는 삼성 해고노동자 김용희씨(60)의 기사를 읽으며 ‘아, 우리 사회가 또 한 명의 노동자를 죽음의 위험으로 몰아넣었구나’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저러다 큰일 나겠다”고 별다를 것 없는 한두 마디를 보탰다.  

삼성그룹 해고 노동자 김용희씨가 9일 서울 강남역 사거리 교통 폐쇄회로TV 철탑에 올라가 복직을 요구하며, 고공 농성을 벌이고 있다. 김영민 기자

그러다 불현듯, 정말 불현듯, 깨닫고 말았다. 철탑 위에서 앙상한 몰골로 나타난 저 사람이 1년 전 내가 손잡아주지 못했던 바로 그 사람이란 것을. 잊고 있던 기억이 갑자기 되살아나며 철탑 위의 인물과 겹쳐진 순간, 잠시 숨이 멎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그리 길지 않았던 그와의 만남을 비교적 자세히 기억해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태도가 다른 제보자들과 조금 달랐기 때문이다. 그는 회의실 문을 나서는 순간까지 “꼭 기사화해 주세요. 꼭 연락 기다리겠습니다”라는 말을 단 한번도 하지 않았다. 

보통 제보자들은 자신의 절박함을 전달하기 위해 어떻게든 한마디라도 더 하려 하기 때문에 이야기를 끊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는 “필요하면 연락드리겠다”는 내 의례적인 멘트에 “알겠습니다”란 말만 남기고 여상히 돌아섰다. 그가 그럴 수 있었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그는 애초부터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고 왔던 것이다.

그가 결국 철탑 위에 올라가고야 만 것은 자신이 당한 해고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언론사를 돌고, 경찰서를 드나들며 지난 28년 동안 해볼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보았다는 뜻이다. 그의 억울한 호소를 거절하고 외면해온 수많은 사람들 중에 내가 있었다. 나는 노동자들이 철탑 위로 올라갈 때마다 “목숨을 걸고 고공농성을 해야만 눈길이라도 한번 주는 우리 사회”를 비판해왔지만, 내가 비판해온 그 ‘우리 사회’ 안에 내가 있었다.  

사측은 그를 성추행범으로 몰아 해고하기 위해 증거를 조작했고, 납치·감금까지 했다. 퇴근길, 정체 모를 사람들에게 각목으로 맞아 20일 동안 중환자실에 입원한 적도 있었고, 아내는 경찰에게 성폭행을 당할 뻔했다. 그는 이 역시 사측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고 의심한다. 

그에게는 어제 같은 그 일을 사람들은 너무 오래전 일이라고 했다. 하루도 더 견디기 어려웠을 그 억겁 같은 기나긴 고통의 세월은, 역설적으로 너무 긴 고통이기 때문에 오히려 주목받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이제 자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를 철탑에 올라가게 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오늘로 63일째. 지금도 그는 삼성 측의 사과와 복직을 요구하며 “새들도 둥지를 틀지 않는” 서울 강남역 8번 출구 앞 CCTV 철탑 위에 있다.

<정유진 정책사회부장>

'일반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산책자]쇠못 자석  (0) 2019.08.12
[여적]직지원정대  (0) 2019.08.12
[여적]‘요즘 것들’ 1990년대생  (0) 2019.08.09
[공감]빌런들을 퇴치하는 유일한 방법  (0) 2019.08.08
[여적]엄마부대와 아베  (0) 2019.08.08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