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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중학교 학생증에서 사진만 오려갖고 지갑 속에 넣어놨다이. 낮이나 밤이나 텅 빈 집이지마는 아무도 찾아올 일 없는 새벽에, 하얀 습자지로 여러 번 접어 싸놓은 네 얼굴을 펼쳐본다이. 아무도 엿들을 사람이 없지마는 가만가만 부른다이. … 동호야.’

동호는 한강의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에 나오는 열다섯 살 난 소년이다. 동호는 자신의 집에서 자취를 하던 또래 친구와 친구의 누나를 찾아 헤매다 도청에 있던 동네 형들과 누나들을 도와 수많은 주검을 수습한다. 이 소설을 다시 꺼낸 든 것은 5·18 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영화 <택시운전사>를 보고 온 날이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하늘색 체육복 위에 교련 점퍼를 걸친 동호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책은 2014년 5월 나왔는데, 당시에는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차마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밀쳐놓았다가 지난해 읽은 것 같다.

동호는 <택시운전사>에서 대학가요제에 나가고 싶어 대학생이 됐다는 스무 살의 구재식(류준열)과 겹쳐졌다. 택시기사 김만섭(송강호)이 독일 기자 피터(토마스 크레취만)와 동행해 광주를 찾은 날, 지역 택시기사 황태술(유해진)의 집에서는 늦은 저녁밥상이 차려졌다. 독일 기자의 통역을 도운 재식도 함께했다. 대학가요제 얘기에 모두 ‘한 곡조 뽑아보라’고 난리였고 재식은 순진하고 해맑은 모습으로 어설픈 노래와 춤을 선보인다. 이 평화롭고 행복한 한때는 곧 불어닥칠 비극의 전조여서 더욱 아프게 다가왔다. 영화 속 재식과 소설 속 동호는 그날의 광주에서 계엄군에 맞서다 푸른 주검이 된다.

<택시운전사>의 열기가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배급사 쇼박스의 자료를 보면 26일 오전 기준 누적 관객 1100만명을 넘어섰다. 영화가 일으킨 바람 덕분인지 한강의 소설을 다시 찾는 이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출판사 창비에 따르면 <소년이 온다>는 최근 33쇄를 찍고 20만부를 돌파했다. 작가의 철저한 고증과 취재를 바탕으로 한 소설은 당시 광주 상황을 담담하면서도 가슴 시리게 그리고 있다. 그러나 137분짜리 영화와 216쪽의 소설을 보고 난 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답답함을 느낀다. 37년 전의 일이지만 지나온 세월이 죄스러울 만큼 그날의 진실들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근 문재인 대통령의 지시로 5·18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군 전투기 출격 대기와 헬기 사격 여부를 진상 조사하게 됐다. 국방부는 국군 기무사령부 보존 자료를 공개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동안 국방부 차원의 ‘5·18 광주 민주화운동 진상 조사’가 세 차례 시행됐지만 당시 5·18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국군 기무사령부 보존 자료는 기밀로 분류돼 열람이 제한됐다.

다음달 ‘5·18 광주 민주화운동 헬기 사격 및 전투기 대기 관련 특별조사 위원회’가 운용에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이번 조사에서 ‘군사기밀보호심의위원회’가 기밀 자료 해제를 결정하면, 5·18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기무사 자료가 처음 세상에 공개된다. 그러나 국방부 조사 위원회에는 수사권과 기소권이 없다. 5·18 진상 규명의 최대 난제인 ‘발포 명령자’가 누구인지 규명하는 일은 쉽지 않을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이 때문에 국회에서 ‘5·18 진상 규명 특별법’을 제정해 조사권·기소권 등 법적 강제력을 가진 진상 규명 위원회를 설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영화는 광주의 그날 이후 시간을 훌쩍 뛰어넘는다. 택시운전사 만섭은 여전히 손님을 싣고 달리고, 독일 기자는 기자상을 수상한다.

영화를 보고, 소설을 읽는 우리들도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책에서는 막내아들을 잊지 못하는 동호의 노모뿐 아니라 도청에서 함께했던 동네 형과 누나들, 살아남은 사람들의 삶이 담겨 있다.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 네가 방수 모포에 싸여 청소차에 실려간 뒤에. 용서할 수 없는 물줄기가 번쩍이며 분수대에서 뿜어져나온 뒤에. 어디서나 사원의 불빛이 타고 있었다. 봄에 피는 꽃들 속에, 눈송이들 속에. 날마다 찾아오는 저녁들 속에. 다 쓴 음료수 병에 네가 꽂은 양초 불꽃들이.’

작가는 취재를 마치고 찾은 소년들의 무덤가에서 동호의 목소리를 들었던 것일까. 책 끄트머리 에필로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제 당신이 나를 이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나를 밝은 쪽으로, 빛이 비치는 쪽으로, 꽃이 핀 쪽으로 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그날의 동호와 재식이 다 보지 못한 5월의 눈부신 햇빛을, 우리는 꼭 되찾아주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의무다.

<김희연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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