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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동계올림픽이 끝났다. 선수들의 값진 승리와 감동적인 인간 드라마는 온 나라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국가대표 컬링팀인 ‘갈릭 걸스’(애칭)가 일으킨 ‘영미 신드롬’까지 재밌고 유쾌했다.

그러나 모두들 온전히 흥겹지는 못했을 것이다. 다른 한편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선 성폭력을 고발하는 문화예술계 ‘미투(#MeToo)’가 연일 터져나왔기 때문이다. 대중에게 사랑받아온 유명 배우가 제자들에게 가한 성폭력이나, 문화계 거장으로 불리던 연출가들의 성폭력 은폐 시도와 침묵은 분노를 일으켰다. 2년 전 ‘문단 내 성폭력’ 고발이 나왔지만 검찰 조직 내 성폭력 폭로로 다시 촉발된 미투는 문학에서 시작돼 연극, 영화, 방송 등은 물론 종교계까지 그 민낯을 드러냈다. 깊이를 잴 수 없는 ‘검푸른 심연’처럼 성폭력은 분야를 망라하고, 아주 오랜 시간, 상습적이고 다양한 형태로 이뤄져왔다.

[장도리]2018년 2월 22일 (출처:경향신문DB)

요즘 같아선 신작이 나왔다고 해서 작가를, 감독을, 배우를 인터뷰하거나 작품을 소개하기 망설여진다. 언제 어디서 또 누가 가해자의 얼굴로 세상에 드러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미투가 시작되기 전, 위계권력에 의한 성폭력이 이 정도로 만연해 있는 줄 몰랐기에 사회적 충격은 더 크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몰랐던 것일까. 성폭력의 구체적인 정황이야 알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성폭력을 비롯해 권력에 의해 부당하게 자행되는 폭력들에 눈감고 무뎠던 게 사실이다. 개인이 경험하는 폭력의 정도는 그 사람이 속한 사회가 어느 정도로 권력과 위계에 예속되어 있는지를 말해준다.

권력에 예속된 사회의 적나라함은 특정 나라에 한정되지 않는다. 할리우드 배우들의 폭로를 거쳐 전 세계에서 거대한 미투 물결이 일고 있기 때문이다. 전 세계에서 양성평등에 가장 근접한 나라로 손꼽히는 아이슬란드에서조차도 권력관계에서 빚어진 성폭력이 사회 이슈로 불거졌다. 스웨덴에서도 마찬가지다. 스웨덴의 권위 있는 신문인 다겐스 뉘예테르(DN)는 ‘스웨덴의 미투 운동은 이제 혁명이며 1919년 여성 참정권 운동 이후 가장 큰 여성 운동’이라고 표현할 정도다. 그만큼 미투의 사회적 파장이 크다.

‘미투 운동’의 본질은 권력에 예속된 현재의 사회구조를 변화시키려는 문제 제기에 있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선 미투가 전개되며 그 본질을 흐리는 말들이 끼어들고 있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는 미투 운동이 당초 한국당 국회의원을 음해하기 위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그는 24일 SNS를 통해 한국당의 ‘북 김영철 방남 반대’를 언급하는 가운데 “우리 당 국회의원을 음해하기 위해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 소위 미투 운동이 좌파 문화권력의 추악함만 폭로되는 부메랑으로 갈 줄 저들이 알았겠느냐”고 했다.

방송인 김어준씨는 최근 미투 운동이 진보적 성향을 가진 인사들에 대한 ‘공작’ 소재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씨는 이날 팟캐스트를 통해 “이거(미투 운동)는 공작의 사고방식으로 사안을 바라봐야 보이는 뉴스” “그런데 공작의 사고방식으로 이걸 보면 어떻게 보이냐. … (성폭력) 피해자들을 좀 준비시켜서 진보매체를 통해서 등장시켜야 되겠다. 그리고 문재인 정부의 진보적 지지자들을 분열시킬 기회다”라며 마치 현재의 미투가 정치적 공략의 가능성을 지닌 듯 말했다.

이에 대해 금태섭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SNS에 “눈이 있고 귀가 있다면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피해자들이 겪어야 했던 일을 모를 수가 없을 텐데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라며 “피해자들의 인권 문제에 무슨 여야나 진보 보수가 관련이 있냐”고 말하기도 했다. 공감능력은커녕 현실인식조차 없는 정치권과 그 주변이 미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성폭력 가해자 못지않은 2차 피해를 만드는 행위로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잡음에 흔들림 없이 미투 운동은 갈수록 생명력을 더하고 있다. 더 이상 피해자들의 용기에만 기대지 않고 사회 변화에 함께 나서겠다는 주체들의 동참이 시작됐다. 25일에도 공연계 ‘미투’와 ‘위드유’ 운동을 지지하는 공연계 관객들이 서울 대학로에 모여 성범죄 가해자들의 의혹 규명과 처벌을 촉구하며 목소리를 냈다. 아직 일부이지만 공연을 제작하며 관련 계약서 내 성폭력 조항을 체계화하는 등의 제도 개선 움직임도 나온다. 미투는 어느 날 불쑥 나온 게 아니다. 그 뿌리가 질기고 깊다. 마치 뿌연 안개와 공기가 그런 것처럼 한번에 손으로 잡아내 몰아내기도 힘들다.

그러나 미투가 향한 방향이 옳고 분명한 만큼 또 함께 연대하는 사회 구성원들이 있는 한 그 여정을 의심하지 말자. 미투는 이제 시작이다.

<김희연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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