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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쓴 글은 읽지 마시라.’ 글 쓰는 후배들에게 가끔 건네는 말이다. 전적으로 내 경험인데, 가능하면 전에 쓴 자기 글은 읽지 말라고 권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잘 썼을까 봐’. 다른 하나는 ‘잘 못 썼을까 봐’. 잘 못 쓴 글은 그렇다 해도 잘 쓴 글이 왜 문제가 되는가. 문제가 된다. 오래전에 쓴 글이 좋아 보인다면 지금의 내가 그때보다 뒤처져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런 글을 마주하면 분발해야 한다.
반대로, 오래전에 쓴 글이 안 좋아 보인다면 당연히 낭패다. 이런 글을 무슨 낯으로 발표했단 말인가. 다시 읽을 때 곤혹스러운 글은 ‘생각하기, 쓰기, 고치기’ 이 세 과정 중 어느 하나를 소홀히 한 채로 내놓은 글이다. 그래서 나는 오래전에 쓴 글은 읽지 않는다. 예외가 있다. 전에 시사주간지 기자 생활을 한 적이 있어서 간혹 예전 지면을 들춰봐야 할 때가 있다. 그런 경우에도 자괴감이 들까 싶어 필요한 대목만 골라 본다.
며칠 전, 10여년 전에 쓴 기사를 검색할 일이 생겼다. 평창 동계올림픽 때문이다. 빙상 경기에 특별한 관심이 있지도 않았지만, 한 시민단체의 올림픽 반대 논리에 설득당한 참이어서 개회식 중계방송에도 눈이 오래 가지 않았다. 시민단체는 경기장을 짓느라 원시림을 훼손하는 것은 물론 대회가 성공적으로 치러진다 해도 이후 시설 관리에 막대한 비용이 들어간다고 지적했다. 국가 주도의 ‘메가 스포츠 이벤트’는 구시대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론은 이내 묻혔다. 남북이 단일팀을 구성하고 북쪽에서 응원단에 특사까지 보내오자 평창에서 들려오는 뉴스에 귀가 솔깃해졌다. 한쪽에서는 ‘평양올림픽’이라며 반대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지만 나는 그때부터 평창 소식에 민감해졌다. 특히 여자 아이스하키 팀 관련 뉴스. 북에서 온 ‘무뚝뚝한 감독’이 자기감정을 노출하기 시작했다. 단일팀이 선전할 때마다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리는가 하면, 남쪽 선수들의 등을 두드리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태극마크를 단 귀화 선수들은 북에서 온 감독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지난해 5월, 촛불이 정권을 교체하던 순간, 많은 분들이 그랬겠지만 나도 적지 않은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중 하나가 민간 차원의 남북 교류였다. 이전 두 정권은 ‘바리케이드’에 가까웠다. 겨우 뚫어놓은 대화 채널을 봉쇄했다. 그사이 남쪽은 다시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이상한 섬’으로 돌아갔다. 바다가 아닌 북쪽은 배를 띄울 수 없는 이상한 바다로 다시 돌아갔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북해’가 열릴 것이란 예상은 사실 나의 바람에 가까웠다. 10여년 전 약속 때문이다.
벌써 13년이 흘렀다. 2005년 7월20일, 남쪽 작가 98명이 북에서 내려온 고려민항에 올라 평양을 방문했다.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 작가들이 만나 ‘6·15 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민족작가대회’를 개최한 것이다. 1945년 12월 남북 문인들이 분단을 막기 위해 서울에서 전국문학자대회를 열기로 합의한 이래 꼭 60년 만에 성사된 역사적 만남이었다. 남과 북의 문인들은 5박6일 동안 평양, 백두산, 묘향산에서 ‘통일문학의 새벽’을 논의했다.
‘방문증명서’를 받아든 나는 그야말로 만감이 교차했다. 내게 분단 상황은 전쟁을 직접 겪은 선배 세대 못지않은 ‘절벽’이었다. 상상력을 옥죄는 금기였다. 표현의 자유는 분단이란 절벽 앞에서 사어(死語)였다. 부산에서 기차를 타고 파리나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갈 수 있었던 식민지 세대보다 상상력의 부피가 결코 크지 않았다. 대륙적 상상력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으니 나는 ‘섬나라 사람’이었다. 외국여행 대신 ‘해외여행’이란 말을 자연스럽게 써온 것이 그 증거 중 하나였다.
그해 7월23일 새벽, 백두산 천지에 오르던 기억이 생생하다. 전날 삼지연공항에 착륙하던 불안한 순간도 선명한 동영상으로 남아 있다. 천지에서 마주한 일출과 운무, 푸르다 못해 시리던 새벽하늘. 무엇보다 놀란 것은 천지였다. 생각보다 훨씬 크고 깊고 맑았다. 그리고 인민문화궁전에서 만난 북쪽의 젊은 시인이 생각난다. 그간 잊고 있던 이름을 이번에 기사를 다시 읽으며 되찾았다. 박씨 성을 가진 30대 중반 여성 시인. 평양을 떠나기 전날 만찬장에서 박 시인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분열의 60년보다 이 며칠이 더 길게 느껴졌다. 사랑하는 사람은 눈빛으로 말할 수 있는 것처럼 많은 말이 필요 없다. 이 대회가 고맙다. 참 행복하다.” 그리고 결의에 찬 목소리로 덧붙였다. “서울 가는 데 또 60년이 걸린다면 죽고 말 겁니다.” 서울로 돌아오고 나서 북한 시인의 절규를 잊고 있었다. 이듬해인 2006년 서울에서 2차 대회를 열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2차 대회는 개최되지 못했다.
‘평화’올림픽이 끝나고 ‘평양’은 돌아갔다. 올림픽이 잠시 괄호쳐 놓았던 북한 핵 문제가 다시 불거질 것이다. 한반도에 봄이 언제 찾아올 것인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이어질 것이다. 그래서 남북 단일팀이 어렵사리 열어놓은 ‘대화의 창’이 더 커 보인다. 종교계와 학계가 앞장서서 저 창을 문으로 만들어 내야 한다. 문은 벽에다 내는 법. 기회가 없지 않다. 내년이 3·1운동 100주년이다. 남북이 손을 잡고 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지금·여기로 돌아오다 보면, 다가올 100년이 보일지도 모른다.
<이문재 | 시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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