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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21장 7절이 허용하듯이 전 제 막내딸을 노예로 팔 의향이 있어요. 딸아이는 조지타운대 2학년이고, 이탈리아어를 유창하게 합니다. 자기 순서가 되면 항상 식탁을 말끔히 치우죠. (노예로 파는 데) 괜찮은 값은 얼마입니까?”

미국 드라마 <웨스트윙> 시즌2 에피소드3 ‘중간선거’편에서 대통령 제드 바틀렛이 극우 인사인 제이콥스에게 한 말이다. 제이콥스는, 동성애를 ‘혐오스러운 것’이라고 불렀다는 바틀렛의 지적을 듣자 “제가 아니라 성경이 혐오스러운 것으로 불렀다”고 말한다. 작가 애런 소킨은 바틀렛 입을 빌려 현대에서 폐기된 구약의 여러 규범을 예로 들며 제이콥스를 통박한다. 동성결혼 합법화(2017년) 17년 전 다뤄진 에피소드다. 

오래전 미드의 한 장면이 떠오른 건 최근 김진태의 발언 때문이다. 그는 지난달 26일 안상수가 국회 의원회관에서 주최한 ‘국가인권위원회법 개정 촉구대회’에 나와 “(동성애를 허용하면) 성경 구약에 있는 소돔과 고모라처럼 될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안상수와 김진태 등은 인권위법 제2조의 ‘성적 지향’ 문구를 삭제하고, 성별을 남녀성별로 바꾸자는 내용의 개정안을 냈다.

소돔은 동성애 때문에 천벌을 받았는가. 목사 이상철은 “예수님이나 구약시대 예언자들이 소돔 혹은 소돔과 관련된 이야기를 거론할 때 동성애와 관련된 죄를 언급한 적은 한번도 없다”고 했다. 소돔에서 유래한 ‘소도미(sodomy)’도 “후대에 형성된, 동성애를 둘러싼 위악적인 이데올로기일 확률이 높다”고 말한다. 

천벌을 받아 마땅한가. 구약의 여러 문제를 가장 신랄하게, 도발적으로 비판한 이 중 한 명은 조제 사라마구다. 

타계 1년 전 내놓은 마지막 소설 <카인>은 주인공 카인을 구약의 여러 시공간을 오가는 존재로 설정했다. 카인은 소돔과 고모라에서 죄 없는 어린아이마저 유황불에 불타 죽은 일을 거론하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형제를 하나 죽였는데 여호와는 나를 벌했다. 정말 알고 싶은데, 이 모든 죽음에 대해 누가 여호와를 벌할 것인가.”

구약이 동성애를 저주했다 한들 저 오래전 문헌을, 잔인함으로 점철돼 기독교에서도 논란인 여러 기록을 곧이곧대로 믿고 따라야 하는가. 구약을 신봉하는 이들이라고 자녀를 노예로 팔 리는 없다. 이삭을 산 제물로 바치려 한 아브라함 같은 이들을 기독교도 중에서 찾기 힘들 것이다.

구약이 명시한 소돔과 고모라의 죄는 환대 거부, 폭력과 강간이다. 이스라엘 국기를 집회장에 들고나온 개신교도들은 성폭력과 미투, 난민 문제에 어떻게 대처하는가. 이들이 구약에서 찾아낸 반동성애 근거는 선택적이기도 하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때도 나오지 않은 인권위법 개정안 발의는 인권·진보 측면에서 한국 사회 역행을 드러내는 뚜렷한 위기 징후다. 징후를 현실로 만들려는 움직임에 야당 대표가 서 있다. 동성애를 ‘혐오스러운 것’으로 치부하며 동성애 반대에 앞장선 목사 전광훈과 “동성애는 담배 피우는 것보다 훨씬 유해하다. 한번 맛들이면 끊을 수가 없다”고 말한 김문수가 지난달 20일 ‘단식 투쟁’에 들어간 황교안과 함께 손잡고 ‘투쟁’을 외쳤다. 황교안도 “개인적으로 동성애에 대해서 반대한다. 정치적 입장에서도 동성애는 우리가 받아들여서는 안된다”고 한 인물이다.

극우세력의 준동을 방기하는 게 ‘촛불정부’다. 여성가족부는 10일로 예정한 ‘가족정책 패러다임 전환 토론회’ 토론주제에서 동성혼·동성애를 배제했다. 인권위법 개정안엔 더불어민주당 의원들도 이름을 올렸다. 차기 국무총리 후보로 유력한 이는 동성애 문제에선 황교안과 입장이 비슷한 김진표다. 

인권의 첨병이자 마지막 보루여야 할 인권위는 무력하다. 인권위 권고는 여러 정부 부처·기관에서 무시당하기 일쑤다. 인권위 권고도 줄고, 부처나 기관의 수용률도 줄었다. 인권위는 이 문제를 자초했다. 혐오와 배제 문제에 비타협적이어야 할 인권위는 김문수의 저 혐오발언에 면죄부를 줬다. 대통령도, 총리도 이름을 올린 차별금지법 제정안은 수년째 폐기된 상태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공언한 인권위는 정치적 부담 때문인지 그 일정을 뒷전으로 미뤘다. 그 와중에 나온 게 인권위법 개정안이다. 언제까지 핍박받고, 고통받는 자들의 존재와 존엄, 권리를 “나중에”로 미룰 것인가.

지금 ‘진보정부’는 진보·인권 문제에서 법률과 정책으로 변화를 만들어가는 주체가 아니다. 제도와 법률로 신장을 이룬 건 ‘조국발 검찰개혁’에서 비롯된 재벌이나 고위 공직자 같은 권력자들의 ‘피의자 인권’뿐이다.

<김종목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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