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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야당은 빈곤의 악순환에 깊이 빠져들고 있다. 오랜 기간 그 쳇바퀴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것이다. 몰락을 인정하지 않고, 다시 설 것이라는 근거 없는 낙관이 그들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 한 그렇다.

망하지 않았다는데, 왜 버림받았는지 반성을 할 턱이 없다. 억한 심정 탓에 남의 흠만 크게 보인다. 반등의 출발점이 성찰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들 앞에 놓인 ‘어둠의 터널’은 끝을 헤아리기 어렵다.

그들은 “모든 게 박근혜 때문”이라고 착각한다. 박 전 대통령을 쫓아내고 친박근혜계 일부를 정리하면 고생 끝이라는 자유한국당의 헛된 기대는 거기서 나온다. 박 전 대통령 출당을 핑계로 호시탐탐 한국당 복귀를 노리는 바른정당 절반의 의원들 생각도 같을 터다. 물론 박 전 대통령과 친박 청산은 필요하지만 그게 다는 아닐 것이다. 박근혜 그늘에서 10년간 단물을 빼먹었던 그들은 국민들에게 국정농단 공범일 뿐이다. 박 전 대통령은 감옥에라도 갔지만 이들은 벌을 받지도, 참회하지도 않았다. 몇 사람 정리해도 여론은 안 돌아선다.

특히 한국당과 민심의 거리는 지구에서 안드로메다만큼이나 먼 것 같다. 지난달 24~25일 국회의원·당협위원장 연석회의에선 맨얼굴이 보였다. “한국당이 부활하기 시작했다”는 홍준표 대표의 궤변에 뒤이어 등장한 홍문표 사무총장은 “돈 없고, 조직 없고, 정권 빼앗겼다”고 했다. 대표는 당이 부활했다는데, 당 살림을 책임지는 사무총장은 파산을 선언한 것이다. 당 홍보책임자는 “홀딱, X됐다”며 무질서 드라마를 코미디로 끝냈다.

요즘 한국당 분위기는 어수선하다. 당 지도부인 최고위원회의 수준은 한참 떨어진다는 말이 들린다. 중앙정치 경험이 없는 원외에 극우성향 인사들로 채워지다 보니, 현실 인식이나 발언 내용이 한심하다는 것이다. 극우보수들로 채워진 혁신위원회가 주도한다는 쇄신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다.

머리가 그런데, 비대한 몸통이 잘 굴러갈 리 없다. MBC를 망가뜨린 김장겸 사장에 대한 체포영장 발부를 언론파괴 공작이라며, 정기국회 보이콧까지 결정한 것은 비웃음을 살 것이다. 명백한 증거가 있는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 국정농단을 두고 “집요한 보복”이라고 우기는 것도 마찬가지다. 자신들이 올린 담뱃값을 다시 내리자며 ‘서민감세’를 주장하는 뻔뻔함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현실이 암울하고, 출구가 안 보일수록 빠지기 쉬운 것이 집단최면과 과대망상이다. 이런 병적 징후를 보이는 집단은 현실을 외면한 채 듣고 싶은 말만 듣고, 만나고 싶은 사람만 만난다. 홍 대표가 “연말이면 과거 지지층이 회복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모습이 딱 그렇다. 홍 대표가 극우인 류석춘 연세대 교수를 혁신위원장에 앉힌 것도, 그로부터 듣기 좋은 말만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보수개혁을 내세웠던 바른정당은 비틀거리고 있다. 절반에 이르는 의원들이 박 전 대통령 출당을 고리 삼아 한국당에 돌아갈 것이란 소문으로 어수선했던 터에, 당 대표 금품 수수 논란이 불거졌다. 지난 대선 때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을 데려오기 위한 ‘떴다방’을 만들기 위해 한국당을 떠났던 다수 의원들은 오히려 몰락을 반길지 모른다. 수구보수와 결별하겠다며 몸부림쳤던 일부 의원들이 떠오르지만, 안타깝게도 이게 현실이다.

이런 난장판에서 보수야당들이 내놓은 해법은 고작 통합이다. 박 전 대통령도 정리수순으로 접어들었으니, 통합으로 일어설 일만 남았다고 이들은 생각한다. 하지만 흉한 것들끼리 합치면, 꼴도 보기 싫은 흉물이 될 수 있다. 한국당과 바른정당이 어떤 형태로 합치든 두 배로 보기 싫은 모습이 될 것 같다.

최근 <쫓겨난 사람들>이란 책을 읽으면서 맥락없이 보수야당을 떠올렸다. 미국에서 네번째로 가난한 도시라는 밀워키의 도시 빈민들이 잘못된 주거정책 등의 이유로 살던 집에서 반복적으로 퇴거되는 등 가난과 불평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세밀하게 담은 책이다. 구조적 모순에 신음하는 책 속 빈민들에게 죄송스럽지만, 이 책을 보수야당과 연관짓게 된 것은 ‘퇴거’라는 말 때문이었다.

책 속 빈민들은 열악한 주거환경으로 쫓겨나기(퇴거)를 반복하는데, 보수야당이 이런 악순환에 빠졌다는 데에 생각이 미친 것이다. 집권당에서 야당이라는 작은 집으로 쫓겨났지만, 곧 극우정당이라는 단칸방으로 밀려나고, 이대로라면 거리에 나앉을 수도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모든 반등의 출발점은 성찰이다. 왜 이 꼴이 됐는지 생각하고, 잘못에 대한 진지한 용서를 구하라. 보수통합이라는 어설픈 정치공학으로 덮으려 한다면 정치권 보수들의 추락은 끝없을 것이다.

<이용욱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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