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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에 출입할 때 서울중앙지검 부장검사급 이상 간부들이 기자들 군기를 잡는 손쉬운 방법이 있었다. 미운털이 박힌 기자를 제 방에 출입하지 못하게 하는 건 약한 편에 속했다. 전화도 받지 않거나, 혹여 받더라도 모르쇠로 일관하면 기자는 ‘단독기사’는 고사하고 남이 쓴 기사도 받아쓰지 못하는 딱한 처지에 놓인다. 때로는 특정 기자의 태도를 문제 삼아 차장검사가 출입기자단과 정례적으로 하는 티타임을 중단하기도 했다. 티타임에서 듣는 말의 뉘앙스로 수사의 진행 상황을 가늠해야 하는 기자들에게 티타임 중단은 일종의 단체기합이었다. 검찰과 언론의 극단적인 정보 비대칭에서 가능한 군기잡기였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이 MBC에 취한 기이한 대응은 기존의 정치문법으로는 독해가 불가능하다. 특정 언론사 기자의 대통령 전용기 탑승을 배제한 것은 언론을 적으로 돌리는 자해적 조치였다. 정작 윤 대통령 취임 후 가장 중요한 정상외교였던 지난 순방의 의제와 결과는 전용기 탑승 배제 논란에 덮여버렸고, 이 문제가 외신으로도 큼지막하게 보도돼 국격은 땅에 떨어졌다. BTS와 <오징어 게임> <기생충>을 배출한 문화 선진국의 자부심으로 충만했던 이 나라는 졸지에 트럼프의 미국, 푸틴의 러시아, 보우소나루의 브라질처럼 독특한 대통령의 독특한 행태가 주목받는 가십성 스캔들의 나라로 세계에 비춰졌다. 과거 청와대를 출입하면서 대통령 해외순방을 취재할 때는 상상하기 힘들었던 일이다. 뒤이은 도어스테핑 중단 조치 역시 마찬가지다. 윤 대통령 스스로 공언한 대통령실 용산 이전의 가장 큰 명분, 취임 후 한 일 가운데 그나마 잘한 편에 속한다고 평가받는 것을 스스로 내팽개치는 심리구조를 보통사람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새삼 검찰 출입기자 시절의 기억을 떠올린 것도 그래서다. 윤 대통령의 행태를 보고 기시감이 들었다. MBC 기자의 전용기 탑승을 불허한 것은 간부급 검사들이 못마땅한 기자의 제 방 출입을 금지한 것과 비슷하다. 윤 대통령은 MBC 기자들의 전용기 탑승을 배제하며 ‘국익’을 명분으로 들었는데, 이 말에선 ‘수사는 언론과 함께 가야 한다’는, 검사들이 즐겨 쓰는 상투적 관용구의 냄새가 난다. 그 와중에 윤 대통령이 전용기에서 특정사 기자들과 따로 만난 것은 친분이 있거나 마음에 드는 기자를 제 방으로 불러 차 한 잔이라도 내놓는 검사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도어스테핑 중단은 일종의 단체기합이라는 점에서 차장검사의 티타임 중단 조치와 닮았다. 다른 점은 도어스테핑을 생중계로 지켜봐온 국민들까지 졸지에 함께 기합을 받는 꼴이 됐다는 것뿐이다. 윤 대통령이 서울중앙지검 부장검사, 차장검사 수준의 식견과 그릇으로 언론을 대하고 나라를 운영한다는 뜻이다. 

이태원 핼러윈 참사를 대하는 윤 대통령의 태도는 어떤가. 윤 대통령은 “엄연히 책임이라고 하는 것은 (책임이) 있는 사람한테 딱딱 물어야 하는 것”이라며 “그냥 막연하게 다 책임져라, 그것은 현대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얘기”라고 했다. 윤 대통령이 말하는 책임은 ‘법적 책임’을 뜻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대통령과 장관직은 ‘법적 책임’ 못지않게 ‘정무적 책임’을 지는 자리이다. 과거 참사가 발생하면 대통령이 곧장 머리 숙여 사과하고 장관을 경질하고 한 것은 국민 안전을 지켜야 할 총괄 책임자의 정무적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였기 때문이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보여주기식 쇼가 아니었다. 윤 대통령의 말은 검사의 언어이지 대통령의 언어가 아니다. 법안 처리가 누구보다 아쉬운 사람은 국정운영을 책임진 윤 대통령일 터인 데도 국회 과반 의석을 점한 야당 대표를 한사코 만나지 않는 배경 역시 ‘검사 윤석열’의 정체성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국정운영의 카운터파트가 아니라 그저 범법자로 보는 것 같다.

윤 대통령을 보면서 제 상상력의 빈곤을 절감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해석되지 않는 일들도 ‘검사 윤석열’을 열쇳말로 놓으면 풀린다. 이렇게 국정을 운영하는 자신감의 원천 또한 검찰이다. 검사 출신 대통령 아래서 검찰은 명실상부한 동일체가 되었고, 정권과 완벽한 화학적 결합을 이루었다. 그러니 기존의 정치적 상상력의 한계를 시험하는 일들은 앞으로도 무궁무진하게 펼쳐질 것이다. 정치적 내전 상황은 갈수록 격화할 것이다. ‘대통령다움’에 대한 최소한의 기대와 전망조차 안이한 것이었다. 한국 사회는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유형의 대통령을 경험하고 있다.

<정제혁 사회부장 jhjung@kyunghyang.com>

 

 

연재 | 아침을 열며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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