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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쓰는 후배 중에 유강희 시인을 좋아한다. 나보다 키가 작아서이고 나보다 더 지극한 시를 쓰기 때문이다. 30여 년 전, 그가 대학 신입생이었을 때 문학동아리 행사에서 처음 만났다. 창작집에 실린 그의 시는 재학생 중에서 단연 빛났다. 나는 어깨를 두드려주며 말했다. 머지않아 시인이 될 것 같군.
두어 달 후, 신춘문예 당선자 명단 속에서 유강희의 이름을 발견했다. 198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어머니의 겨울’이 당선된 것이었다. 불과 열아홉 살의 나이에 말이다. 당선작은 고등학교 때 써놓은 작품을 개작한 것이었다. 등록금 마련 때문에 쩔쩔매던 절박함이 그의 시에 각을 세웠던 것.
유강희는 국민교육헌장이 발표되던 1968년 전북 완주군 구이면에서 태어났다. 위로 형이 셋에 남동생이 세 명 있었으니 아들만 칠형제인 집이었다. 어린 강희는 강아지, 염소, 메기, 까치, 지렁이, 허수아비 같은 온갖 형상을 흙장난으로 만들며 컸다. 예닐곱 살부터 아버지 심부름으로 대두병을 들고 큰길가 점방에 막걸리를 받으러 다녔다. 말할 것 없다. 홀짝이며 시골길을 걸었다. 비어 있는 병의 높이만큼 물을 채운 것도 자연스러운 스토리다.
초등학교 때 겨울, 식은 고구마를 식구들끼리 저녁으로 먹고 나면 아궁이에 불을 때면서 형이 읽다 만 미당의 <화사집>을 읽던 조숙한 소년이었다. 강희는 덕진중학교에 입학하여 1학년 때 미술을 가르치는 이승우 선생님의 눈에 띈다. 문집에 그림을 그리고 문집이 활자로 되는 기쁨을 처음 맛보았다.
강희는 가난했다. 가난했지만 가난을 딛고 일어서려는 오기 같은 것도 없었다. 그저 사람 좋고 술 잘 마시고 시 잘 쓰는 후배일 뿐이었다. 나는 강희에게 전주에서 나오는 월간잡지사의 일을 맡겨보기도 했고, 서울의 신생 출판사에 밀어 넣어보기도 했다. 1992년 강희는 출판사에서 월 20만원 정도를 번 것으로 기억한다. 보증금 20만원에 월세 8만원 하는 서울 이문동 월세방에 살면서 죽어라 시를 썼다. 한 달 벌어 한 달을 살던 강희는 저녁마다 술을 마셨다. 서울 생활 4년 만에 이 악물고 써낸 시를 모아 문학동네에서 첫 시집 <불태운 시집>을 펴냈다.
거기까지였다. 강희는 2002년 봄날, 용달차 한 트럭이 못 되는 짐을 부려 불태우듯 서울 생활을 청산한다. 전북 김제시 금구면 율리에 있는 오두막집으로 낙향한다.
강희는 그때 ‘죽으러 밤골에 들어갔다’고 말한다. 오리나 치며 살아야겠다고 부드럽고 독한 결심을 했다. 오리를 불리지도 더 줄이지도 않으며 힘닿는 만큼의 마릿수를 놓고 소란하면서도 다정한 오리 울음을 하루치의 양식으로 삼아야겠다고 작심했다. 하지만 강희의 삶은 늘 식은 고구마 같았다.
동쪽으로 첩첩한 구성산이 가로막고 서쪽이 들판인 밤골 마을에서 가장 젊은 그는 오리 말고도 거위와 기러기를 쳤다. 담뱃값이라도 벌어보자는 심산이었다. 밖으로 출타하는 일도 거의 없었다. 그때 그는 늘 취해 있었고 폐인 같았다. 내가 잘 입지 않는 헌 옷을 한 보따리 싸서 전해주면 그는 키우던 기러기가 낳은 알을 건넸다. 나는 그것을 시로 남겼다.
대설도 며칠 남지 않은 겨울 저녁, 슬레이트로 지붕을 인, 보일러도 잘 돌아가지 않는 방을 가로지르는 쥐에 못 견뎌 시인은 덫을 놓았다. 통통한 쥐가 갇혔다. 그런데 어미 쥐는 사각의 양철 쥐덫에 갇혀 털도 없이 꼼지락거리는 빨간 새끼를 낳았다. 죽음을 예감한 어미 쥐가 하루라도 빨리 새끼를 낳기 위해 출산을 앞당겼는지 새끼 쥐는 이내 죽었다. 강희는 갈대밭 아래 새끼 쥐를 파묻고 이를 시로 썼다.
가난하고 높고 외로운, 아니 구질구질한 시절이었다. 토란의 귀, 싸릿재 너머 저수지에서 잡아 온 우렁이, 굴뚝새와 산취, 호박벌과 가물치, 귀신사 검은 대나무, 볏짚 속의 고양이, 귀룽나무, 저녁똥 등이 그의 시를 채웠고, 그는 ‘억새꽃’ 같은 절창을 써냈다. 이용악과 백석이 그의 시에서 되살아나던 4년여의 세월이었다.
강희는 오리막을 손본 후 구이에 있는 내 작업실에 자주 들렀다. 박남준 시인은 도랑의 버들치를 잡아가는 사람들에게 전쟁을 선포하기도 했지만 강희는 후배 시인들과 내 작업실 곁 개울의 버들치를 잡아 라면수프를 넣은 어죽을 끓였다.
2005년 두 번째 시집 <오리막>을 펴낸 후 김용택 시인은 강희를 “야, 오리야”라고 부른다. 그러면 강희는 입술을 내밀어 오리 주둥이를 흉내 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언젠가 나는 강희의 옆구리를 쑤시며 동시를 써보라고 권했다. 그가 썼던 시의 중심에 동심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눈여겨봐 둔 터였다. 그래서 나온 게 첫 번째 동시집 <오리발에 불났다>이다. 그는 땅속의 돼지감자를 “땅속에 웅크려 잠자고 있던/ 울퉁불퉁 분홍 코 돼지”로 바라본다. 그의 집중적인 사유가 만든 관찰의 결과였다. 얼마 후 그는 <지렁이 일기예보>라는 동시집을 또 냈는데 여기 실린 ‘고드름 붓’은 중학교 1학년 국어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여러 권의 시집과 동화집, 동시집을 냈지만 쉰 살이 다 되어가도록 강희는 장가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는 신문 칼럼에다 썩 괜찮은 신랑이 하나 있다고 공개적인 글을 쓰기도 했다. 머리에 탈모가 시작된 강희가 과연 결혼을 할까 했는데 한 모임에서 강희는 운명의 초등학교 여교사를 만났다. 그의 눈빛이 바뀌고, 옷차림이 변하기 시작하는 걸 나는 그때 보았다. 사랑이라는 말의 상투성을 멀리했던 그가 정말 상투적으로 아름다워지고 있었다.
강희는 멋진 턱시도를 입고 작년 4월 식목일에 문우들을 초청해서 결혼식을 올렸다. 나는 어정쩡하게 서서 처음으로 주례 비슷한 역할을 해보았다. 가능하면 아이를 많이 낳으라는 내 주문이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어 애가 타는 중이다.
시인 중에도 자신의 속된 욕망을 시인이라는 이름으로 애써 가리려고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나는 유강희한테서 그런 모습을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는 무한히 착하고, 매사에 지극하고, 자신을 낮춤으로써 상대를 높일 줄 아는 사람이다. 그가 옆에 있어서 나는 좋다.
유강희에게 드리워진 농경문화의 정서가 때로는 촌스러워 보이지만, 이 촌스러움이 유강희 시의 강력하고 뜨끈한 힘이라는 걸 나는 안다. 그의 시와 동시가 겨울을 맞는 이들의 가슴에 따뜻한 난로가 되기를 빈다.
안도현 우석대 교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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