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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움켜쥐고 재고 궁리하는 것일까. 열흘 사이 박근혜 대통령의 대국민담화를 보며 두 번 다 고개를 저었다. 떠오른 단어는 ‘찔끔찔끔’이다. 10·25 담화는 최순실을 알고, 취임 후에도 일정 기간 일부 자료들의 의견을 묻고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전날 밤 대외비 국정 문건들이 최순실에게 유출돼 결재받듯이 첨삭된 사실이 보도된 것까지만 시인한 녹화방송이었다. 11·4 담화는 한뼘 더 나갔다. 최순실과 왕래가 있었고, 국민의 삶에 도움이 될 미르·K스포츠 재단을 만들었고, 검찰 조사나 특검도 받아 드러난 잘못은 책임지겠다고 했다. 대통령도 기업도 선의로 했고, ‘특정 개인’의 위법행위가 문제였다고 했다. 기업과 검찰엔 참작하라는 ‘뼈’가 보인다.

대통령의 말은 하루도 안돼 허언이 됐다. 청와대 부속실까지 도운 비선의 국정농단은 양파 껍질처럼 계속 까지고, 기업들의 팔과 목을 비튼 증언이 이어졌다. 첫 사과 후 광화문에 켜진 2만개의 촛불은 두 번째 사과 후 20만개로 불어났다. ‘5% 신기록’을 세운 국정 지지율에서 20·30대는 1%, 40·50대는 3%다. 60세 밑으로는 여론조사 오차범위(±3.1%)를 감안할 때 엄밀히는 0과도 구분할 수 없는 바닥 숫자가 나온 것이다. 들통난 ‘핀포인트’ 담화는 대통령답지 않고, 떠밀리듯 내놓은 단견은 역풍만 키웠다. “이러려고 대통령을 했나 자괴감이 든다”는 자조도, 어려울 때마다 써먹던 ‘공주의 눈시울’도 약발이 다했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6년 11월9일 (출처: 경향신문DB)

말 그대로 녹다운이다. 박 대통령은 8일 국회의장을 찾아 “국회가 총리를 추천하면 내각통할권을 넘기겠다”고 한발 더 물러섰다. 개헌과 김병준 총리 지명자 카드를 던지며 마지막까지 집착한 국정의 ‘중심 줄’도 놓기 시작한 것이다. 또다시 찔끔이고, 물러나라는 촛불과는 간극이 크다. 내각의 어디까지 넘기겠다는 것인지도 여전히 모호하다. 하나, 힘의 균형은 완연히 무너졌다. 통치 에너지는 소진됐다. 공직사회의 지도력과 여권 내 통제력도 잃었다. 2선이냐, 퇴진이냐. 사실상 야당과 여론의 선택을 기다리는 처지가 됐다. 그는 명함과 의전만 남은 ‘식물대통령’이 될 수도 있고, 커지는 “퇴진” 들불을 끝내 넘지 못할 수도 있다. 대통령의 내리막길은 요동치고 길 것이다.

눈은 두 곳으로 향한다. 광화문과 서초동이다. 광화문에선 낮에 시국선언, 밤에 촛불과 자유토론이 흐르고 있다. 시민항쟁은 12일 100만 촛불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서초동엔 두 개의 ‘유령’이 배회하고 있다. 검찰은 “국가 정책이었다”는 박 대통령의 ‘선의’와 맞닥뜨리고, 새 민정수석이 된 ‘최재경 방패’와 부딪쳐야 한다. 어찌 보면, “모든 게 제 잘못”이라며 지금 일일이 말하기 어렵다는 대통령의 담화는 두 재단의 시작부터 ‘기획자’와 ‘윗선’ 위치에 있었고, 전후의 많은 것을 직접 알고 있음을 시사한다. 서울대 교수 728명이 박 대통령을 “으뜸가는 피의자”로 지목한 이유다. 관건은 증거와 의지다.

사진이 말한다. ‘왕수석’ 우병우가 팔짱 낀 채 묘한 웃음을 짓고, 수사검사와 수사관은 손을 앞으로 모으고 서 있다. 일요일인 지난 6일 밤 조선일보 사진기자가 망원렌즈로 당긴 서울중앙지검 11층이다. 당당하고 여유 있는 피의자와 부동자세로 서 있는 수사검사. 착수 111일 만에 이뤄진 우 전 수석의 늑장수사지만 그 끝도 휘어 있을 것임을 예고하는 장면이다. 시민들의 의심은 넘쳐도 합당하다. 우병우 앞에서 떨면서 대통령은 어떻게 수사할까. 친하지 않지만 우병우에서 최재경으로, 같은 TK와 특수통으로 민정수석과 검찰 인사권의 바통을 넘긴 것도 임기 말 동요를 최소화해보려는 정권의 원려가 읽힌다. 오래전 대검 간부가 사석에서 경향신문 만평을 보는 소회를 밝힌 적 있다. 지금도 많이 등장하는 “살찐 얼굴과 ‘떡검’ ‘색검’ 딱지를 안 쓸 수 없느냐” “제발 개가 아닌 사람으로 그려달라”는 주문이었다. 말 끝엔 그래도 가장 싫은 게 “특검”이라며 웃었다. 지금 서초동은 예고된 특검에 앞서 민주공화국을 사유화한 ‘거악’과 맞서는 운명에 처했다.

최순실 패닉만 달포째, 멀리 정운호 게이트가 터진 5월부터 따지면 홍만표-진경준-우병우-최순실·차은택-박근혜로 이어진 난맥은 여섯 달째, 정부는 그새 ‘부평초(浮萍草)’가 됐다. 정책도 신뢰도 국정동력도 붕 떠버렸다. 군 통수권이 있다고 대통령의 말에 힘과 영이 설까. 유엔이나 기후변화회의 무대에 선다고 그의 말에 미래가 그려질까. 무신불립이다. 다수의 반대에도 밀어붙인 국정교과서와 쉬운 해고, 사과보다 돈을 먼저 받은 위안부 합의에도 95%의 민심은 다시 물음표를 던지고 있다. 대통령이 두 번이나 국민 앞에 머리를 숙였다. 참회의 끝은 국정 U턴이고, 길은 끊긴 곳에서 다시 시작돼야 한다. ‘박근혜의 길’은 끊겼다.

이기수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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