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짓밟힌 잔디처럼 누워 있던 목소리가 이곳저곳으로 번져가고 있다 말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끝내 털어놓게 되는 이야기들 여름의 잡초처럼 녹색으로 물들던 상처들 점점 번져가다 파도가 된다 덮쳐오는 슬픔과 밀려드는 과거 사이에서 파도는 한 자락씩 푸른 늑대가 되어 밤하늘을 날아다닌다 홀로 서 있던 빨간 등대가 늑대들에게 깜빡깜빡 신호를 보내면 우거진 여름 안에서 구불구불 날아드는 늑대들 숨기면 숨길수록 더 또렷해지는 불안이 보름달처럼 높이 떠오르고 우울이 거대한 혹등고래를 타고 천천히 떠 내려온다 계속해서 덮쳐오는 해일과 파도 속에서 이야기는 뼈만 앙상하게 남았네 숨겨오던 불온한 상처들에 대해서 한 번쯤은 온전히 이해받고 싶었지 잠잠히 듣고 있던 당신의 동공 속에서 슬픔이 망각의 비로 흘러내린다 잔디와 파도와 늑대가 혹등고래를 타고 천천히 떠 내려간다 

박세랑(1990~)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간직한 채 살아간다는 건 힘든 일이다. 마음 깊은 곳에 꾹꾹 눌러 온 상처는 끝내 몸과 마음을 잠식한다. 벼랑 끝까지 몰린 후에야 어렵게 털어놓지만, 이내 후회가 밀려온다. 불안한 예감은 늘 적중한다. 어설프게 털어놓은 과거는 “점점 번져” 걷잡을 수는 없는 상황이 된다. 과거를 아름답지 않게 하는 건 사람이다. 수면 위로 올라온 상처는 쉽게 덮을 수 없다. 입과 입을 통해 왜곡되고 부풀려져 비수처럼 등에 와 박힌다. 

“늑대가 되어 밤하늘을 날아다닌다”는 구절은 미로코 마치코의 그림책 제목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바람이 거세게 부는 것은 늑대가 하늘을 뛰어다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늘에서 늑대가 설칠수록 상처는 깊어진다. “숨기면 숨길수록 더 또렷해지는 불안”은 밤하늘을 밝히는 보름달처럼 환해 더 부끄럽다. 설상가상으로 서서히 우울이 덮쳐온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잠잠히 내 이야기를 들어줄 당신이 곁에 있기 때문이다. 단 한 명이라도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다.

<김정수 시인>

 

연재 | 詩想과 세상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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