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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詩想과 세상

서쪽

opinionX 2022. 8. 29. 10:41



서쪽으로 머리를 두고 

서쪽을 오래 본다 

절반도 쓰지 못한 하루가 사라지는 곳 

고요한 감전의 이야기가 고여 있는 곳 

한 생의 꽃이 피고 기우는 곳 

스무 살의 여우비와
거짓말 같은 사람들도 그곳에서
왔고, 갔다 

누워서 똥을 싸는 꿈을 꿨는데
서쪽은 부끄럽지 않았다 

같은 방향으로 날아가는 새들과 바람이
어디쯤에서 쉬어 가는지
알 수 없지만 

내가 심지 않은 풀에서도 
 
서쪽 냄새가 가득했다 

이채민(1958~)


시인은 지난해 여름, 코로나19 백신을 맞고 죽음을 껴안았던 7일간의 기록을 시 ‘백신 보고서’로 남겼다. 백신을 맞고 30분 후 몸을 가눌 수 없을 만큼 휘청거렸고, 바로 응급실로 들어가 의식을 잃었다. 응급처치를 받아 겨우 고비를 넘긴 시인은 입원 나흘째 퇴원했지만, 다시 열이 오르고 심장이 두근거려 종합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정밀검사와 집중치료를 받고 퇴원했지만, 급격한 시력 저하와 탈모, 우울증을 겪어야 했다. 백신 후유증은 현재진행형이다.

7일간의 삶과 죽음의 교차 후 시인은 오래 서쪽을 바라본다. “한 생의 꽃이 피고 기우는” 서쪽은 죽음을 품은 ‘미지의 세계’다. 생이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 잠시 머무는 데가 서쪽이다. 동쪽이 정면으로 마주본다면 서쪽은 뒷모습과 그림자를 떠올리게 하는 방향이다. 서쪽은 “절반도 쓰지 못한 하루가 사라지”고, “고요한 감전 이야기가 고여 있”다. 동쪽에서 시작된 삶이 서쪽으로 기울수록 주변 사람도 서서히 줄어든다. 서쪽은 혼잣말이 잘 어울리는 곳이다.


<김정수 시인>

 

 

연재 | 詩想과 세상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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