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페이스북 공유하기
    12
    트위터 공유하기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밴드 공유하기
    네이버블로그 공유하기
    구글플러스 공유하기
    이메일로 공유하기
    공유 더보기

인쇄
글자 작게
글자 크게
입력 : 2016.01.24 20:23:46 수정 : 2016.01.24 20:29:03

1992년 10월 직업적 이유로 라이프치히에 들른 적이 있습니다. 라이프치히 중앙역의 웅장함과 우아함에 깊은 인상을 받았지요. 역사(驛舍)를 나오니 오른쪽으로 아스토리아 호텔이 우뚝 서 있었습니다. 저는 ASTORIA라는 글자 뭉치를 보며 크리스토프 하인의 어떤 소설을 떠올렸고, 그 연상의 행로는 크리스타 볼프나 슈테판 하임 같은, 그 무렵 한국에서 읽히기 시작한 동독 출신 작가들로 자연스럽게 이어졌습니다. 괴테거리를 따라 내려가니 라이프치히 대학이 보였습니다. 유럽의 대학들이 흔히 그렇듯, 라이프치히 대학도 캠퍼스라기보다는 그저 건물들이더군요.

저는 그 대학 건물들을 둘러보며 철학자 빌헬름 분트와 에른스트 블로흐, 물리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와 구스타프 헤르츠 등 이 학교에서 가르쳤던 지성사의 거장들을 떠올렸습니다. 또 라이프니츠와 괴테를 비롯해, 작곡가 슈만과 바그너, 철학자 니체 같은 이 학교의 유명한 학생들도 떠올렸습니다. 저는 한때 언어학도였던 터라, 라이프치히 대학이 19세기 역사비교언어학의 둥지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청년문법학파라는 이름으로 한 세대를 풍미하던, 그러나 앞서 거론한 사람들보다는 덜 알려진, 헤르만 파울과 카를 부르크만 같은 이 학교의 언어학자들도 떠올렸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이 재학할 때 카를 마르크스 대학이라고 불렸던 당신의 모교를 둘러보면서도, 저는 당신을 떠올리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그즈음, 통일된 독일의 헬무트 콜 내각에서 여성청년부 장관으로 일하고 있었지요.

그로부터 여덟 해 뒤인 2000년 당신은 야당으로 물러난 기민련의 대표가 되었고, 그보다 다섯 해 뒤인 2005년에는 독일연방공화국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연정 파트너를 바꿔가며 지금까지 집권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비교 대상이 되기를 매우 꺼리실 테지만, 영국의 마거릿 대처 전 총리의 집권기간 11년6개월을 곧 넘어서, 민주적으로 선출된 최장기 여성 최고권력자가 될 참입니다. 아니 남자까지를 포함해도, 12년을 집권한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을 추월할 것이 분명하고, 운이 좋다면 14년을 집권한 프랑스의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까지 제칠지도 모릅니다. 만일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당신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민주적으로 선출된 최장기 최고권력자가 되는 셈입니다. 대통령과 총리를 오락가락하는 푸틴의 러시아를 온전한 민주주의 국가라고 할 수 없다면 말입니다.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센 여자입니다. 어쩌면 남자를 포함해도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센 사람일지 모릅니다. 임기를 한 해 남겨놓은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나 국내외에 정적들이 수두룩한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이나 일종의 집단지도 체제인 중국의 시진핑 주석의 실제적 힘이 당신보다 약할지도 모른다는 뜻입니다. 당신은 독일의 총리를 넘어서 유럽연합의 총리입니다. 한때 유럽연합은 프랑스와 독일의 양두마차 체제로 굴러갔지만, 이제 프랑스의 힘은 독일에 견줄 수 없을 만큼 쇠약해졌습니다.



당신은 신비한 사람입니다. 그 신비감이 당신의 매력을 강화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박사학위를 받고 막 연구자 생활을 시작한 양자물리학자가 정치로 방향을 튼 것도 그렇고, 동독 출신의 여성이 통일 독일의 최고권력자가 돼 이리 길게 집권하는 것도 그렇고, 공인으로서 사생활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도 그렇습니다. 사실 공인으로서의 사생활만이 아니라, 함부르크에서 태어난 당신이 목사인 아버지를 따라 동독으로 이주한 뒤에 보낸 35년의 세월도 봉인돼 있습니다. 당신이 동독으로 이주한 것은 1954년, 당신이 태어나고 몇 주 뒤였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기 전이기는 하지만, 서독의 어떤 젊은 목사가 목회활동을 하기 위해 동독으로 이주했다는 것이 분단국에 사는 저로서는 잘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당신은 35년의 동독 생활에 대해 거의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독일이 통일되지 않았다면, 당신은 지금 물리학자가 돼 있을지도 모릅니다. 자연과학에 대한 당신의 갈증은 독일의 가장 뛰어난 화학자 가운데 한 사람일 당신의 남편이 채워주고 있겠지요. 당신이 뛰어난 물리학도였다는 건 알려져 있지만, 어쩌면 당신의 재능은 물리학보다도 정치에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총리가 되기 전 한 인터뷰에서 당신은 “권력의 매력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고 “예전 같으면 정치를 통해 뭔가를 이루는 묘미라고 대답했을 거예요. 이제는 상대로부터 뭔가를 빼앗는 맛이라고 말하고 싶네요”라고 너무 솔직하게 대답했습니다. 그 몇 해 뒤, 당신은 늘 당신을 깔보았던 사민당 출신 총리 게르하르트 슈뢰더로부터 총리직을 빼앗았지요.

그러나 당신은 정치를 통해 많은 것을 이뤄냈습니다. 당신은 일본의 3·11 대지진이 일어난 지 사흘 만에 물리학자로서의 오랜 신념을 거두고 원자력발전소의 가동 기한 연장을 취소함으로써 독일의 에너지 정책을 완전히 뒤집었습니다. 당신은 네타냐후가 집권한 뒤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냉각시키고 팔레스타인의 정치를 국가 차원에서 지원한다는 뜻을 명확히 했지만, “독일 총리인 나에게 이스라엘의 안전은 결코 협상 대상이 아닙니다. 유대인 민주주의 국가 이스라엘의 안전을 위한 동참은 독일의 국가이성에 속합니다”라는 발언으로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이 저지른 반인도 범죄를 끊임없이 참회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집무실 전화를 도청하는 우방국 지도자 오바마와, 당신이 개를 무서워한다는 걸 알고 크림반도의 대통령 별장에서 당신 앞에 래브라도를 풀어놓은 푸틴 사이에서 유럽연합의 홀로서기를 시도해왔습니다. 얼마 전 뉴스를 보니 푸틴은 2006년의 그 사건에 대해 거듭 자신은 당신의 개 공포증을 몰랐다고 변명하더군요.

유로화를 지키려는 당신의 노력은 유럽연합 내부에서 많은 적을 만들었습니다. 당신을 히틀러로 묘사하는 일부 그리스 사람들을 포함해, 남유럽 국가들의 시민들에게 당신은 인기가 없습니다. 유럽연합에서 나가자는 여론이 우세한 영국도 결국 독일의 구심력을 두려워하고 있는 거지요. 그러나 적이 없는 정치인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정치인으로서 당신이 이룬 가장 큰 업적은 시리아를 비롯해 분쟁지역에서 오는 난민을 최대 규모로 받아들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중동이나 아프리카의 분쟁에는 옛 식민주의 제국주의 국가들의 원죄가 바탕에 깔려 있는 만큼, 그런 원죄가 영국이나 프랑스, 미국 같은 나라들보다 훨씬 덜한 독일이 난민들에게 이처럼 관대하다는 것은 독일이라는 나라의 위대함을 보여줍니다. 그 위대함은 “내가 조국이라는 말을 쓴다면, 그것은 과도하게 높여진 위상의 조국이 아닙니다. 나는 독일이 형편없이 나쁘다거나 군계일학처럼 훌륭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나는 케밥과 피자를 아주 좋아하고, 거리에서 만나는 이탈리아 사람들이 훨씬 아름답다고 여기며, 스위스의 태양이 더 오래 빛을 비춘다고 생각합니다”라는 당신의 발언에서 더 높은 차원을 얻습니다.

지난 세밑에 쾰른에서 난민들이 여성들에게 가한 성폭력과 거기에 대한 반동으로 독일 전역에 번지고 있는 반난민 시위 때문에 당신의 처지가 어렵다는 것을 압니다. 당신도 정치인인 만큼 반난민 여론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나쁜 선택은 당신의 난민정책에 ‘컨트롤 알트 딜리트(Ctrl-Alt-Del)’를 누르는 것입니다. 당신은 독일과 유럽의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세계의 지도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신과 같은 호모사피엔스로서 저의 자부심이기 때문입니다. Ich bin stolz auf Sie, Frau Bundeskanzlerin!


고종석 | 작가·칼럼니스트

'=====지난 칼럼===== > 고종석의 편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홍세화 선생님께  (0) 2016.02.14
이정희 전 통합진보당 대표께  (0) 2016.01.31
정동영 전 의원께  (0) 2016.01.17
아메리카합중국 시민들께  (0) 2016.01.10
문재인·안철수 의원께  (0) 2016.01.03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