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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책읽기는 닮은 점이 많다. 그것은 우리가 애타게 기다리던,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을 위한 시간 보내기이며 달콤한 휴식이며 동시에 재충전을 의미한다. 그리고 물리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여행과 책읽기는 우리를 다른 세계로 옮겨놓는다. 순식간에. 그리고 다른 세계로 이동한 우리는 잠시나마 우리가 떠나온 현실 세계를 그 어느 때보다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는 기회를 갖게 된다. 그 때문에 얻게 되는 어마어마한 효과가 있다. 새로운 삶의 전망을 얻게 된다는 것. 독서와 여행을 통해 말이다.

세상에 여행과 독서의 힘으로 인생을 바꾼 수혜자 그룹이 있다면 나 자신이야말로 그 그룹의 중심에 있어야 할 것 같다. 사표 쓸 각오로 받아낸 1년 무급 휴가로 여행과 독서를 병행한 덕이다. 틀림없이 그 덕이 맞다.

거대한 나무뿌리에 깔리다시피 한 타프롬 사원. 경향신문 자료사진

그 경험 이후 한참을 헤매긴 했지만 결국 나는 잡지사 기자 생활을 접고 원하던 대로 가끔 글 쓰고 수시로 몸을 놀려 노동하는 시골의 민박업자가 됐다. 하루 두 번 개와 함께 시골길을 산책하며 더 이상 감옥 같은 마감과 야근은 내 것이 아니다 되뇌는데 그러면 그때마다 얼마나 심장 뻐근하게 행복한지 모른다.

바로 그 여행과 독서의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싶은 무의식의 발로 같은 걸까? 여권과 책만 챙기면 비행기 탈 준비가 다 된 것 같다. 대체로 여행가방 안에 무슨 책을 넣을지 고민하며 짐 싸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고민한다. 이걸 넣을까? 아니 뺄까? 혹시 너무 무거울까? 빼면 나중에 가져오지 않은 걸 후회하게 될까? 읽을 게 없어서 손가락 빨며? 혹시 너무 심심해서 태국어로 쓰여 있는 음료수 병에 붙은 성분 표시 안내문 같은 걸 읽게 되는 건 아닐까? 비행시간이 총 9시간이고 그중 공항에서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반인데, 걱정하며…. 늘 그런 식이다, 비행기 타기 전까지.

그런 과정을 통해 간택받은 책은 총 6권. 그중 2권은 우리의 여행 목적지 앙코르와트에 대한 것이고, 남편과 나의 책이 각각 2권씩이었다. 그중 내가 고른 책은 LP에 이어 카세트테이프로 음악 듣기가 다시 유행하고 있는 지금의 포스트디지털시대를 이해하기 딱 좋은 책 <아날로그의 반격>(데이비드 색스, 2016년 뉴욕타임스 선정 올해의 책)과 주진우 기자의 <주진우의 이명박 추격기-저수지를 찾아라>.

그 책들과 함께 캄보디아 여행을 다녀왔다. 인천공항이 생긴 이래 최대 인파가 이번 추석 연휴에 해외 여행을 다녀왔다고 하는데 우리는 바로 그 직전 여유롭기 그지없는 비수기에 여행할 수 있어서 좋았다.

게다가 앙코르와트가 아닌가? 영화 <화양연화>에서 양조위가 자신의 소심함 때문에 한 번도 활짝 꽃피워 보지 못한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앙코르와트의 돌틈 속에 봉인하는 모습을 본 이래로 늘 그곳에 가고 싶었다. 무엇보다 그곳은 남편과 나, 우리 두 사람이 꼽는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첫 번째 여행지였다.

과연 좋았다. 컴퓨터도 포클레인도 없던 고대의 인간이 순수한 노동력만으로 그런 엄청난 보물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인간이 가진 위대한 창조력과 신비를 느끼기에 이보다 더 좋은 장소가 있을까? 1860년 밀림을 탐험하다 우연히 앙코르와트를 발견한 프랑스 식물학자 앙리 무오의 말처럼 이곳의 건축물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인이 세운 것보다 더 장엄’하고, 거의 노예 상태에 가까웠을 수많은 도공들이 새긴 그 많은 조각품은 하나같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섬세하고 아름답고 창조적이어서 미켈란젤로가 눈곱만큼도 부럽지 않을 정도다.

가져온 책도 어쩜 그리 앙코르와트와 안성맞춤이던지. <아날로그의 반격> 거의 마지막 페이지에 적힌 이런 글이 눈에 띄었다.

“디지털이 줄 수 있는 것은 현실세계의 풍성함을 흉내 낸 모사에 불과하다.”

맞다. 아무리 실감나는 영화를 본들 알 수 있겠나? 컴퓨터 게임 같은 액션영화 <툼레이더>를 아무리 여러 번 본다 해도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있겠나? 거대한 스퐁나무들이 뿌리를 내려 버려진 채 무너져 가고 있는 사원들을 움켜잡고 있는 현장 앞에 서 있는 경험이 어떤 것인지. 말할 수 없이 아름답고 관능적인 그 많은 압사라 무희들의 부조작품을 실재하는 장소에서 손에 잡히는 물건으로 경험하는 일이 얼마나 감동적인 일인지.

그렇다면 앙코르와트를 여행하는 내내 우리와 함께한 <이명박 추격기>는 왜 여기에 온 것일까? 처음엔 몰랐다. 내가 왜 하필 이 책을 들고 캄보디아에 왔는지. 그런데 여행하면서 알았다.

“앙코르 왕조의 수리야바르만 2세는 자신의 왕권을 신격화하기 위해 앙코르와트를 지었어. 신에 가까워지고 싶은 그의 야망이 건축과 예술을 집대성한 이런 걸작을 만들게 한 거지. 그런데 이명박은 돈에 대한 야망으로, 그것도 그와 그 주변 인물들만 벌 수 있는 돈을 위해서 국민의 대다수에게 엄청난 해악이 되는 4대강 사업을 했어. 수리야바르만은 인공저수지 위에 앙코르와트를 지었지만 이명박은 저수지에 돈을 감춰뒀지. 우리만의 앙코르와트를 지을 수도 있는 엄청난 돈이야. 그걸 찾아내야 해. 백년, 천년 뒤의 후대를 위해서도. 앙코르와트든 이집트든 세계 어디에 있든 주진우의 책 <이명박 추격기>를 사서 읽어야 하는 이유지.” 집에 돌아가면 3권 더, 아니 가능하면 더 많이 이 책을 사야겠다며 내가 남편에게 한 말이다.

<김경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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