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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갈이, 본디 ‘수족관이나 수영장 등의 물을 간다’는 뜻이다. 국어사전에는 ‘기관이나 조직체의 구성원을 큰 규모로 바꿈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는 풀이가 들어 있다. 매번 총선 때마다 ‘물갈이’가 최고의 승리 공식이 되어 대규모 현역 의원 교체가 반복되었기에 사전에까지 등재된 것이다. 16대부터 20대 국회까지 초선의원 비율은 절반에 육박한다. 현역 의원이 4년마다 절반 가까이 바뀌는 셈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초선의원 비율이 최고로 높다. 기성 정치에 대한 냉소와 불신을 넘어설 수 있는 유력한 선거 무기로 ‘물갈이’가 동원되어온 결과다. 

물갈이 경쟁 속에서 총선 때마다 절반 가까이가 바뀌었지만, 4년이 지나면 어김없이 역대 최악의 국회라는 지탄이 돌아온다. 인적 쇄신이 목전의 선거 승리를 위한 ‘얼굴갈이’에 그치고, 인재 영입이 ‘이미지팔이’에 치중해 빚어진 업보다. 정당의 전문성, 정책 역량이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은 이러한 정치 충원의 빈곤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도, 자유한국당도 다양성과 대표성 면에서 역대 정당 중 최악이다. 무엇보다 16대 총선에서 우상호, 이인영, 임종석, 송영길 등 ‘386’과 ‘남원정’(남경필·원희룡·정병국), 오세훈 등이 등장한 지 20년이 되도록 차세대 정치인을 키워내지 못한 때문이다. 흥행을 위해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 특히 청년을 전시 대상으로 삼는 일회성 영입이 이뤄져온 탓이다. 역대 총선에서 초선의원 교체율은 60~70%에 달한다. 선거철만 되면 한 철 장사하듯 이름값과 이미지 위주로 사람을 뽑아 막상 4년 동안 병풍과 거수기 노릇으로 소비하고 마는 행태가 되풀이되고 있다.

총선 때마다 각 정당들이 영입한 그 많은 ‘인재’ 중에서 실제 정치와 당을 바꾸며 뿌리내린 인물을 찾기 힘들다. 19대 국회에서 ‘청년 정치’의 가능성을 보여준 김광진·장하나 의원도 지금은 여의도에 없다. 20대 총선 때 민주당의 ‘영입 인재 1호’인 표창원 의원은 “좀비에 물린 것 같다”는 뼈아픈 고백을 내놓고 퇴장했다.

장애를 희망으로 바꾼 발레리나 출신 여성, 시각장애인 어머니와 감동적인 삶을 펼친 청년, 실패를 딛고 일어선 자수성가형 벤처기업가, 체육계 미투 1호 여성, 산업재해 공익신고자…. 하나같이 눈물겨운 개인사를 지닌 인물들이다. 어느 당으로 가도 아무 문제가 없을, 달리 말하면 정체성을 구분하기 어려운 인물들이기도 하다. 민주당과 한국당의 영입 경쟁은 오로지 인생극장형 인물 찾기에 꽂혀 있다. 여론의 주목을 받을 ‘스토리텔링’, 낡아빠진 정당의 얼굴을 화장할 ‘비비크림’ 인물이 절실한 것이다. 좋은 스토리를 갖춘 것과 정치를 잘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영입 인재들은 하나같이 ‘자기’로 대표되는 장애, 여성, 청년 문제 등을 어떻게 생각하고 정책을 펼칠지 시늉조차 못했다. 애초 “정치에 ‘정’자도 모른다”는 이들이다.

‘미투’로 실체가 드러난 민주당의 ‘청년 인재 원종건’은 감성팔이 영입 쇼의 바닥을 여지없이 내보였다. 진중권의 지적을 빌리면 미투와 별개로 짚어야할 문제는 ‘정치의 이벤트화’다. 민주당과 한국당은 두 당의 정치적 차이조차 구분 못하는 인물을 오직 과거에 TV에 나와 국민의 심금을 울렸다는 이유로 영입 경쟁을 벌였다. 필요한건 그의 역량이나 정치적 소양이 아니라 ‘대박’ 스토리다. 아마도 ‘원종건 사건’은 4년마다 재방되는 인재 영입 쇼의 민낯을 까발려 ‘흥행’에 찬물을 끼얹었다는 점에서 정치 발전에 기여할 게다.

물갈이를 통해 선거에서 승리하고 좋은 정치를 펼치려면 현역 의원 교체 수 못지않게 누구로 채울 것인지가 더 중요하다. ‘얼마나’보다 ‘어떻게’ 바뀌었느냐가 관건이다. 현역 의원의 빈자리를 청와대 참모 출신 586들이 차지하거나, 보수통합에 따른 나눠 먹기로 채운다면 ‘물갈이’ 효과는 사라진다.

민주당 지역구 국회의원 후보 신청자 475명의 평균 연령이 56.1세라고 한다. 30대는 6명에 불과하고, 50대 이상은 전체 88%에 달한다. 미래 세대의 거점 마련이나 세대교체는 아득해졌다. ‘현역의원 50% 교체와 20~40대 30% 공천’을 다짐한 한국당도 결국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대로면 다시 ‘늙은 국회’ ‘낡은 정당’은 따논 당상이다.

어항 속의 물은 그대로인데 물고기만 바꿔 넣으면 그 물고기도 결국 오래 가지 못한다. 화사한 물고기 몇 마리로 오염된 물을 가릴 수는 없다. 본디 뜻대로 ‘물을 가는’ 수준의 물갈이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21대 국회도 크게 기대할 게 없을 것이다.

<양권모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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