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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다운 청장년 시절을 온전히 감옥에서 보낸 그이들은 이제 늙고 병들었다. 오랜 구금과 고문에 의한 후유증과 암 투병에 시달리고 있다. ‘아직은’ 죽을 수 없다. 분단의 현대사가 문신처럼 새겨진 생의 끝에서 그이들을 일으켜 세우는 것은 희미하지만 결코 놓을 수 없는 꿈이 있어서다. 북녘으로의 귀향, 그 희망의 끈이 없었다면 진즉 스러졌을 터이다. 해도, 야속한 시간은 그이들을 비켜가지 않는다. 같은 길을 걸어온 신념의 동료들은 하나둘 세상을 뜨고 있다. 31년을 복역하고 강제전향 압박을 거부했던 박봉현씨(98)는 지난해 세상을 등졌다. 22년 옥고를 치렀으나 야만의 테러 속에 전향서를 쓴 것을 평생의 치욕으로 아파하던 김동수씨(81)는 지난 8월 눈을 감았다. 남한 땅에서 ‘인간’으로 존재할 수 없던 긴 시간을 견뎌내고, 살아 ‘귀향’을 기다리는 이들은 18명. 아스라이 잊혀진 존재를 일깨운 <귀향-비전향 장기수 19인의 초상>(정지윤 사진전)에 힘입어, 그이들의 이름을 기록한다. 강담(85) 김교영(91) 김동섭(93) 김영식(85) 류기진(93) 문일승(92) 박순자(87) 박정덕(88) 박종린(85) 박희성(83) 서옥렬(90) 오기태(88) 이광근(73) 이두화(90) 양원진(89) 양희철(84) 최일현(89) 허찬형(89). 생존한 2차 송환 대상자들이다. 이들의 복역기간을 합치면 362년에 이른다.

비전향 장기수들이 지난여름 검은 막 앞에 서거나 앉아 사진을 찍었다. 오랜 수감생활로 몸과 마음이 상했지만 형형한 눈빛은 그대로였다. 왼쪽부터 서옥렬, 박정덕, 박종린, 류기진씨. 정지윤 기자

어느덧 18년이 흘렀다. 2000년 6·15공동선언에 따라 같은 해 9월2일 63명의 비전향 장기수가 남에서 북으로 분단을 허물며 넘어갔다. 분단과 냉전의 산물인 비전향 장기수 송환은 민족문제 해결의 한 지평을 연 ‘사건’이었다. 한데 예서 또 다른 비극이 잉태한다. 당시 정부는 ‘전향 여부’를 송환 기준으로 삼았다. 1970년대 국가의 살인적 전향공작 앞에서 전향서를 쓴 장기수들은 송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다큐멘터리 영화 <송환>에는 북송을 앞둔 비전향 장기수들을 위한 환영 장면이 나온다. 연단 아래서 북으로 돌아가는 동료들을 바라보는 김영식씨의 그 처연한 표정을 설명할 언어가 없다. 27년을 복역한 김씨는 두 달에 걸친 전향고문을 당한 끝에 죽음의 그림자를 느끼며 내뱉은 ‘네’라는 한마디 때문에 송환 대열에 들지 못했다.

‘강제전향’ 장기수들의 삶에는 남다른 슬픔과 아픔이 서려 있다. 살인적 폭력으로 빚어진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동료들은 견뎌낸 고문을 왜 못 견뎠을까’ 하는 자괴와 형식상으로라도 양심을 포기했다는 치욕, 결국 종이 한 장에 인생이 갈린 분노는 천형처럼 이들을 따라다니며 옥죄었다. ‘사상전향공작’은 유신 독재 정권이 좌익수 전원을 전향시킨다는 기치 아래 인간이 감내할 수 없는 잔혹한 고문으로 양심을 짓밟은 만행이다.

김씨 등 장기 구금자들은 2001년 2월 ‘전향 무효 선언 및 송환 촉구’ 기자회견을 가졌다. 강압으로 이뤄진 전향 자체가 무효임을 선언하고, 가족이 있는 북으로 송환을 촉구한 것이다. 기자회견이 끝난 뒤 김영식씨가 동료들의 손을 잡고 “이제야 인간이 된 것 같다”며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은 강제전향 장기수들의 도저한 아픔을 웅변하는 상징으로 기억된다. 결국 전향 문제는 이후 국가기관인 의문사진상조사위원회에서 ‘강제전향은 전향이 아니다’라고 인정함으로써 해소되었다.

당초 ‘2차 송환’ 대상자는 33명이었다. 1차 송환 당시 신청을 못했거나, 주로 전향을 했다는 이유로 배제된 이들이다. ‘2차 송환’은 노무현 정부까지는 꾸준히 해결이 모색되었으나, 이명박·박근혜 정부 들어 남북관계가 동결되면서 논외로 사라졌다. 그들의 존재와 사연은 또다시 잊혀졌다. 그런 사이 여럿이 세상을 떠났고, 이제 18명만 살아 있다.

한반도에 평화의 훈풍이 불면서 실낱같은 희망이 지펴지고 있다. 판문점선언에 담긴 ‘민족 분단으로 발생한 인도적 문제의 시급한 해결’이 희망의 씨앗이다. 비전향 장기수야말로 “외세와 분단, 냉전과 대결 시대의 직접 피해자이며 동시에 민족분열로 발생한 인도적 문제 해결의 우선 대상자들”이기 때문이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으로 항구적 평화체제가 정착되면 장기수 송환 등 인도적 문제 해결의 길은 활짝 트일 터이다. 하지만 시간이 없다. 늙고 병든 그이들이 언제 세상을 떠날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시민단체들이 무엇보다 고령 이산가족 상봉과 비전향 장기수 송환 문제를 ‘시급히’ 해결해야 한다고 촉구하는 까닭이다.

<귀향-비전향 장기수 19인의 초상>에 소개된 최일현씨(27년 복역)의 남루한 거실 탁자에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방위원장이 악수하는 사진이 고이 놓여 있다. 거기에는 아마도 ‘송환’ 문제에 대한 대통령과 국무위원장의 관심과 결단을 바라는 비원이 담겨 있을 게다. 6·15공동선언에서 보듯 ‘송환’ 문제는 남북 정상의 결단이 필요한 사안이다.

<양권모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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