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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교수로서 해야 하는 면담 중에 가장 어려운 것은 취업 면담이다. ‘스펙’이 어느 정도 갖춰진 3~4학년 여학생과 만날 때 가장 난감하다. 내가 서울 소재 대학의 교수라면 “공모전을 열심히 해라, 학점과 토익 점수를 좀 더 높여라, 자소서를 직무역량에 맞춰서 정성껏 써라” “교환학생도 가고, 인턴십도 더 해라” 말했을 것이다. 지금도 많은 경우 그렇게 말을 하지만, 이따금 공허할 때가 있다.

적당한 스펙이라면 현실적으로 지역의 적당한 중소기업 사무보조직이나 시민사회단체, 사회적기업, 도시재생센터, 또는 학교의 조교나 계약직 행정직원이라도 찾아보라고 권할 것이다. 그런데 열심히 공부하고 이런저런 활동을 했던 학생들이라면 21세기 직장인의 키워드인 ‘커리어패스’(직업경로)를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직업을 찾아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동시에 ‘오버스펙’이 입사과정에서 문제가 될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실제 취업 성과도 ‘알파걸’들보다 그럭저럭 학교를 다니다 눈높이를 낮추고 기민하게 ‘일머리’를 보여줘서 어디고 찾아낸 친구들이 더 좋았다. 

스펙 무용론을 말하려는 건 아니다. 지역에서 젊은 여성에게 주어진 노동시장이 그렇게 생겨먹었다는 말이다. 서비스산업이나 공공부문의 비정규직 노동이 주된 채용경로가 된다. 공무원, 공기업, 교사로 대표되는 ‘안정적인 직장’이자, 여성들이 채용시험을 통해 남성들을 줄곧 이겨내는 부문이 있다. 그러나 그 경쟁은 수도권에서 내려온 취준생들이나 거점국립대 학생들의 차지가 되기 일쑤다. 지방사립대의 스펙이 괜찮은 여학생들이 타협할 수 있는 진로 선택은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거나, 농촌에서 이주민들에게 교육을 할 수 있는 한국어 교원 자격증이나 다문화사회전문가 자격증 등을 따는 것이다.

사실 내가 있는 동남권에서 일자리 자체는 수도권을 제외하면 가장 많은 편에 속한다. 중화학공업의 주요 사업장이 포항, 울산, 부산, 거제, 창원, 광양, 여수에 넓게 펼쳐져 있다. 제조 대기업의 하청회사까지 포함하면 고용할 수 있는 폭은 엄청나게 넓다. 자동화로 생산직 일자리는 줄어들지만, 사무직이나 대졸 엔지니어의 일자리는 훨씬 감소폭이 작다. 실제로 남학생들은 가족이나 친지, 선후배를 통해서도 일자리가 생긴다. 학교는 정부의 ‘내일채움공제’를 통해 임금의 일정 부분을 채워주는 산학협력 프로젝트로 중소 제조기업의 신입사원 일자리를 만들어 내지만, 역시 남학생이 간다. 공장이 험해 여학생은 안 간다고? 30년 전 사무보조직으로 입사해서 엔지니어 임원이 된 양향자의 사례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채용 관행이 가부장성을 못 버릴 따름이다. 선배 교수로부터 들은 마창노련의 여성노동운동의 전통은 지금 어디 갔나. 요컨대 공공부문이 아닌 이상 지역에서 여성에게 주어지는 일자리는 대부분 ‘진급’이 없는 일자리라고 말할 수 있다. 억대 연봉의 ‘노동귀족’이 일한다는 직장은 지역 여성 관점에서는 아빠와 남편들의 성채일 따름이다.

정치연구소 ThinkWise가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는 출산을 꺼리는 이유에서 성차를 드러냈다. 20~30대 남성들은 ‘N포 세대’ 담론대로 경제적 어려움을 호소했다. “돈이 없어서 아이를 못 낳는다.” 반면 여성들이 꼽은 가장 중요한 이유는 돈이 아닌 경력단절 우려였다.

한국사회에서 유리천장과 경력단절이라는 말이 오해된다는 생각이 든다. 유리천장은 같이 회사에 입사한 동기와 똑같이 일하다가 결혼을 했다는 이유로, 출산하고 돌아왔다는 이유로, 아이 때문에 전화가 온다는 이유로 진급이 밀리고, 연차는 높은데 성과는 못 내는, 일터에서 존재감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말을 내포한다. 경력단절은 비단 일을 하다가 결혼하고 아이 낳고 다시 일을 할 수 없게 된다는 말이 아니다. 처음에 들어간 ‘선망 직장’인 회사를 육아 때문에 관두고 나면 비슷한 직무와 연봉과 승진체계 안에 다시 들어갈 수 없다는 말에 더 가깝다. 의사, 변호사 등 전문직이나 교사, 간호사를 제외하면 모든 여성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죽을 둥 살 둥 간신히 왔는데 왜 낭떠러지로 떨어져야 하는가? “여성의 고학력화로 인해 출산을 기피”한다고 해석하는 기관의 글을 읽을 때마다 혈압이 오른다.

2005년부터 대학 진학률은 양성 간 차이가 없어졌고 좀 지나 여학생이 더 많아졌다. 그러나 한국에서 가장 큰 돈을 버는 제조업 위주의 기업들은 여전히 남성만을 요구하고, 여성들은 이른바 ‘여성직’으로 분류되는 공공부문과 서비스산업에서만 취업성과를 내고 있다. 시험을 통한 채용에서 여성들이 선전하는 걸 보며 젊은 남성들은 ‘성차별’ 같은 건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공공부문 채용을 늘린다고 모든 문제를 풀 수 있는 게 아니다. 더불어 이러한 노동시장 문제는 그 자체로 지역균형발전 문제이기도 하다. 커리어패스 쌓기를 할 수 있는 직종에서 일하는 여성이 혁신도시나 지방 사업장의 남편을 따라 지방으로 이주하면, 그 자체가 경력단절이다. 국가적 어젠다인 저출생 문제 뒤에는 청년취업 외에도 지역의 고용문제, 산업의 지리적 분업구조까지 연결되어 있다. 지방사립대를 나온 여학생들이 승진하고 연봉협상을 할 수 있는 직장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실마리를 잘 잡아야 한다.

<양승훈 경남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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