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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국제 히피인 오승연씨의 사진전이 지난달 23일부터 29일까지 경인미술관에서 열렸다. 오씨는 히피의 삶을 살며 여섯 대륙의 구석구석을 찾아다닌 여행가이지만, 그의 카메라에 담긴 풍경에 명승이나 절승은 거의 없다. 사진전의 제목이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인 것처럼, 자기 존재 전체를 자연에 맡기며 살고, 서로 멀리 떨어져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한 끈으로 연결하고, 그 사람들과 다른 사람들을 연결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늘 그의 카메라를 매혹하였다. 그들은 최소한의 물질로 미래를 걱정하지 않고 살아가며 가장 작은 것으로 행복해지는 방법을 알고 있다. 태어난 땅이 가난해서 최소한의 것으로 살아야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가난에서 건강한 삶을 발견하고 그 삶에 자진해서 몸을 바친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 가운데는 호주 남쪽의 섬 태즈메이니아의 플로렌타인 숲을 벌목회사에 맞서 지켜내기 위해 일곱 해 동안 싸워온 사람들도 있다. 플로렌타인은 유칼립투스 원시림이다. 숲을 지키려는 사람들은 60m가 넘는 나무 위에서 살며, 무장경찰을 앞세우고 불도저가 들어올 때는 그 거대 권력의 하수인들 앞에서 음악을 연주하고 춤을 추고, 서커스 저글링도 하고 명상도 한다. 끝내는 엉엉 울기도 하고 땅에 뒹굴기도 한다. 그렇다고 권력이 감동하여 마음을 고쳐먹는 것은 물론 아니다. 숲을 지키려는 사람들은 자주 감옥에 끌려갔고, 그들의 캠프는 자주 불에 탔다. 중요한 것은 세상에 또 하나의 삶이 있음을 자신들의 몸으로 증명하는 일일 터다. 실은 그 숲에서 발가벗은 한 쌍의 남녀가 그 건강하고 아름다운 몸으로 거대한 유칼립투스를 끌어안으려는 모습을 찍은 사진이 이 전시회의 표제 사진이다. (다행히 유네스코는 지난 7월 초에 이 숲을 세계유산으로 지정하였다.)

호주 블루마운틴 국립 공원 유칼립투스 숲(1997년) (출처 : 경향DB)


타클라마칸의 화염산이나 애리조나의 세도나를 찾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폭염 속에 풀 한 포기 없이 서 있는 거대한 바위산을 바라볼 때도, 층층이 쌓인 붉은 사암의 중턱에서 명상의 자세를 취할 때도 문명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가 어떤 신비에 접하기는 쉽지 않다. 천축국으로 불경을 얻으려 가는 스님의 눈으로 화염산을 보기 어렵고, 백인들에게 쫓겨나기 전의 인디언의 눈으로 세도나의 붉은 봉우리들을 바라볼 수 없기 때문이다. 문명세계의 보호를 받는 우리가 어느 오지에 잠시 들어가 무슨 모험 하나를 벌인다 한들, 그것은 부모들이 모든 허물을 깔끔하게 처리해 주는 부잣집 아들의 반항이나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화염산을 지나가던 스님의 두려움이나 붉은 사암의 꼭대기에 오르던 인디언의 경외심을 인간 전체의 기억 속에서 끌어내어 되새기기 위해 제 존재 전체를 걸고 또 하나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관해 말한다면, 그 노력은 헛된 것이 아니다. 몸을 온갖 이기로 무장하지 않고 살아야 하는 그 삶은 무엇보다도 이 폭력적인 문명이 실은 얼마나 허약한 것인가를 알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순천의 어느 매실 밭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유병언도 그 나름으로는 자연을 사랑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그는 자연 풍광과 숲의 생명들을 지속적으로 찍어 전시했고 책으로도 발간하였다. 그와 깊이 관련되어 있는 구원파와 그의 일가는 전국에 열 개에 이르는 농장을 사들여 경영하고 있으며, 프랑스에서는 농촌 마을 하나를 통째로 매입하기도 했다. 그는 에덴동산에 버금하는 자연 낙원을 꿈꾸었을 터이다. 구원파의 본산인 금수원도 숲 속에 있고, 그의 마지막 은둔처였던 순천 송치재 별장 이름도 ‘숲 속의 추억’이다. 그는 자연을 멋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가 숨어 있는 별장에 수사관들이 들이닥쳐 조력자들이 잡혀가거나 도망가 버린 나머지 혼자 남게 되었을 때, 자연이 그를 따뜻하게 품어주지는 않았던 것 같다. 생명유지에 필요한 가장 작은 일까지도 시중드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왔던 그 귀한 사람은 그들의 손을 놓치자마자 더할 나위 없이 무능한 인간이 되었다. 그가 자연의 본성을 알게 된 것은 별장을 떠나 숲을 헤매다 매실 밭의 풀 속에 눕기까지 일주일이 채 안되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자연은 돈으로 매수할 수 없고 권력으로 호령할 수 없다. 자연 속에 이 안온한 삶을 그대로 옮겨놓으려는 자에게 돈과 권력은 자연을 파괴하는 데만 소용될 뿐이다.

저 오승연씨와 그의 친구들처럼 튼튼한, 그래서 벌거벗을 수 있는 몸과 마음으로 자연을 끌어안은 사람들만 자연을 말할 권리가 있다.


황현산 | 문학평론가·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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