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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초에 춘천에서 서적 출판과 관련해 조금 특별한 학술회의가 열렸다. 그때만 해도 한국에 범용 인터넷망이 깔리기 전이었지만, 각종 문서들이 디지털화하는 추세에 불안을 느낀 출판인들이 책이 맞게 될 운명을 미리 타진하고 그 방책을 세우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나도 질의자로 참석했다.

대학 강단의 연구자이거나 문화예술계 인사인 발표자들은 거의 대부분 당시 유행하던 포스트모던의 문화이론을 들이대며 거대한 문화혁명의 도래를 예고했다. 그러나 출판인들에게 위안을 주는 말도 없지 않았다. 저명한 문학이론가로 연세대 영문과에 재직하며, 당시 ‘연세대 한국어사전’의 편찬을 책임지고 있던 이상섭 교수의 발언이 인상적이었다. 이런 내용이다. 당신은 한국어사전을 편찬하면서 옥스퍼드 대사전을 자주 참조한다. 그 방대한 사전이 콤팩트디스크 한 장에 들어가 있으니 더없이 편리하다. 나르기 쉽고, 컴퓨터에 돌려 낱말들을 검색하거나 정렬할 수 있으며, 관련 예문들을 입체적으로 추출할 수 있다. 여기까지 말하고 이 교수는 어조를 바꾸었다. 그러나 당신이 더 좋아하는 것은 종이로 출판된 옥스퍼드 사전이다. 책과 잉크의 냄새가 어떤 분위기를 형성하고, 한 낱말을 찾다가 다른 낱말에 한눈을 팔 수도 있으며, 책의 수택에 연구자로서 긍지를 느끼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전을 뒤적이다 피곤할 때는 그 두꺼운 사전을 베고 잠을 잘 수도 있다. 시디를 베고 잠을 잘 수는 없지 않으냐. 이 교수가 여기까지 이야기하자 만장한 출판인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이 교수의 발표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그 박수와 환호성이었다. 나는 그게 아닌데 싶었지만, 내 속생각을 마음대로 털어놓을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옥스퍼드사전'을 편찬한 제임스 머리. (출처: 경향DB)


현실은 노학자의 고결한 취향을 무참하게 배반했다. 거대한 사전을 편찬하는 사람들이 이제는 종이책으로 그런 사전을 기획하는 일이 드물다. 사전이 학습용 사전을 넘어서면, 출판사도 이용자도 디지털 버전에 더 많은 기대를 건다. 나의 경우에도 종이책 사전을 펴는 일은 거의 없다. 20종에 가까운 어학사전과 백과사전을 모바일 기기에 담아 작은 가방에 넣고 다니며, ‘앱’으로 판매되지 않는 사전은 인터넷을 통해 이용한다. 디지털사전들을 베고 잠을 잘 수는 물론 없지만, 눈을 감고 종이책으로는 듣지 못할 음악을 들을 수는 있다.

디지털 문명의 시대가 전반적으로 서적 출판에 불리한 사태만 몰고 온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급하게 활자의 죽음을 말했지만, 활자는 그 ‘활(活)’의 본분을 이제야 완수할 수 있다는 듯이 어디서나 질주하고 어디에나 파고든다. 우리 시대보다 더 많은 글자를 소비한 시대가 있었던가. 종이에 갇혀 있던 글자들이 이제는 허공으로 날아다닌다. 책을 만드는 일도 그만큼 쉬워졌다. 원고가 출판사에 들어가서 일주일도 되기 전에 책이 되어 나오는 일이 예사다. 원고가 벌써 책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출판 방식의 변화가 출판의 개념까지 바꾸려 한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사전에 관해 말하게 되면, 이 디지털 환경이 능동적으로 이용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우리말로도 여러 종의 사전이 디지털 앱으로 출간됐고, 인터넷에서도 이런저런 사전을 손쉽게 이용할 수 있지만, 그 대부분이 이미 종이책으로 발간됐던 사전을 디지털화한 것일 뿐이다. 내가 과문한 탓도 있겠지만, 방대한 사전이 디지털로 기획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사전을, 특히 방대한 사전을 디지털로 출간하게 되면 여러 가지 이점이 있다. 무엇보다도 디지털 기기의 저장 용량이 무한대를 운운할 만큼 커졌기에 사전의 부피 같은 것을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새로운 학문적 성과를 지체 없이 반영할 수 있다는 점은 이 사전의 본질적 장점에 속한다. 이용하기에도 편리하다. 종이 사전이라면 수십권에 수만쪽으로도 부족할 내용을 도서관이나 특정 기관에 찾아가지 않고도 저마다 제가 있는 곳에서 작은 기기 하나로 검색할 수 있다. 종이로는 엄두를 낼 수 없는 것을 디지털로는 엄두를 낼 수 있다. 그런데 왜 엄두를 내지 않을까. 종이책의 역사를 디지털로 내면화하는 일에 우리가 아직 서툴뿐더러 그 일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면 국가가 앞장서야 하지 않을까.

물론 국가가 앞장설 리는 없다. 계몽주의 시대의 프랑스는 20여년의 세월에 걸쳐 180여명의 집필자를 동원해 본문 17권 도판 10권의 ‘백과전서’를 만들었다. 그때도 국가는 그 집필과 출간을 막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사전의 이념은 민주주의다. 디지털은 그 이념에 또 하나의 환경을 제공한다.


황현산 | 문학평론가·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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