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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탄핵 사태 이후 그동안 보수적이라고 생각했던 분이 갑자기 당신이 지지해왔던 정당과 대통령을 비판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와 반대로 평소 내가 잘 알던 분이라 여겼던 가까운 친·인척들조차 이런 면이 있었던가, 또는 이런 사람이었나 하고 깜짝깜짝 놀라게 될 때가 있다. 평소 스마트폰 사용을 어려워하고, 문자메시지는커녕 전화도 반드시 필요할 때가 아니면 거의 연락조차 하지 않던 분들이 갑자기 문자메시지를 보낸다. 그런데 보내온 내용을 보면 더욱 놀라게 된다. 이분들은 뉴스도 보지 않는 건지, 아니면 박근혜·최순실 사태가 너무 황당해서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건지 이해하고 납득할 수 없는 내용의 허황된 소식들을 전한다.

이런 상황과 맞닥뜨리면서 문득 떠오른 것이 <짱구는 못 말려> 극장판 시리즈 중 2001년에 제작되었던 <어른 제국의 역습>이었다. 일본에서 버블경제 거품이 꺼지고, ‘잃어버린 20년’ 중 10년이 경과할 무렵 제작된 이 작품은 부모세대의 좋았던 어린 시절에 대한 추억을 담고 있다. 어느 날 짱구가 사는 도시에 ‘20세기 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이곳은 지난 20세기, 일본의 경제 부흥기였던 1970년에 개관했던 ‘엑스포 70’을 비롯해 당시 일본에서 유행했던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 등 부모세대가 좋았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고 추억에 잠길 수 있는 공간이었다. 짱구의 부모는 물론 유치원 원장님과 선생님들 모두 이곳에서 그 시절의 추억과 낭만에 젖는다. 20세기 박물관이 큰 인기를 끌자 복고바람이 불면서 추억의 LP판이 복각되고, 당시 유행이 되살아난다.

그러나 이것은 좋았던 옛 시절로 돌아가고 싶었던 악당 ‘Yesterday once more’의 은밀한 계획이었다. 그들은 현재 어른이 되어 힘겨운 이들에게 젊거나 어려서 좋았던 과거를 그리워하게 만들고 이들을 세뇌시켜 21세기를 20세기로 되돌리고자 한다. 과거의 추억과 향수에 젖은 어른들은 어린애가 되어 자기 자식들을 버리고, 20세기 박물관으로 몰려간다. 부모들이 모두 과거의 추억에 젖어 현재를 망각하고 어린아이가 되어버리자 짱구와 그 친구들은 “얘들아, 20세기 박물관 생기고 나서 너희 부모님들이 이상해지지 않았니? 아무리 옛날 추억이 좋아도 그렇지. 옛날 냄새를 맡더니 어린이가 되어버렸어. 이러다 우리 부모님이 완전히 딴 사람이 되어버리진 않을지 걱정이야”라며 한탄한다.

미국의 사회학자이자 일상생활방법론의 창시자였던 해럴드 가핑클은 우리의 일상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도 수많은 공유지식과 문화가 서로 복잡하게 투사되는 과정임을 실험을 통해 입증하고자 했다. 다시 말해 이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나누는 평범한 대화조차 사실은 눈빛과 몸짓 등 수많은 비언어적 언어와 상식을 공유하고 있다는 전제하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수업을 수강한 학생들에게 가정으로 돌아가 대화의 규칙들을 의도적으로 파괴하여 긴장상황을 초래하는 이른바 ‘상호작용적 반달리즘’ 실험을 진행했다. 이것은 자식세대가 부모와 대화하면서 평소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거친 말투와 의도적인 말대꾸 등으로 그간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일상을 혼란시키는 실험이었다. 그러자 많은 부모들이 자기 자식이지만 갑자기 변해버린 그들을 타인처럼 여기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 우리 사회를 뒤덮고 있는 박근혜·최순실 사태는 어쩌면 그들의 배후에서 과거부터 누려왔던 기득권을 더욱 공고히 하고 싶은 더 큰 악당 ‘Yesterday once more’의 계획에 따라 진행되었던 일련의 사건들이 폭발한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크고 심각한 문제는 지금 우리 사회를 가득 채우고 있는 인화성 짙은 분노와 혐오의 감정이다. 대선을 앞두고 더욱 뜨거워질 지지자와 반대자 사이의 갈등은 물론 세대와 세대, 남성과 여성 사이의 주장에 대해 공감과 치유, 정치적 비전 제시를 위한 진지한 대화가 아닌 조롱과 멸시라는 상호작용적 반달리즘(반지성주의적) 시스템은 결과적으로 서로 간의 의심과 무례함을 자체적으로 증폭시키기 때문이다. 이제라도 서로 대화의 물꼬를 틀 수 있는 생산적 대화가 시작되어야 할 때이다.

전성원 | 황해문화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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