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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인천항에서 배를 타고 1박2일 일정으로 백령도에 간 일이 있다. 그런데 도착한 날 오후 2시에 다음날 배가 뜨지 못한다는 통보를 들었다. 화창하고 바람도 없는 날이었기에 의아했는데, 문제는 해상의 안개였다. 배에는 브레이크가 없기 때문에 장애물을 만났을 때 시계(視界)가 방향을 틀 수 있을 만큼 확보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예기치 않은 3박을 하고서야 백령도를 떠나면서 깨달았다. 멈출 수 없으면 출발할 수도 없다는 것을.
“해는 길고 새 소리 즐거운데/ 비 온 뒤 산 기운 아름다워라./ 깨끗이 치우고 책을 마주하니/ 이제야 옛사람의 마음이 보이네.” 선비라면 으레 이렇게 살았으리라 여기기 쉽지만, 이행이 이 시를 지은 것은 모진 국문 끝에 겨우 목숨을 건져 유배 생활을 하던 때이다. 18세에 문과 급제, 요직을 두루 거치던 이행에게 27세 젊은 나이에 닥친 시련이었다. 이후로도 여러 번 이어진 유배가 개인적으로는 매우 불행한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멈춤은 유능한 엘리트 이행을 깊은 성찰과 독특한 음색을 지닌 시인으로 만들었다.
멈출 줄 모르고 내닫기만 하던 우리 사회가 코로나19라는 위기로 어쩔 수 없는 멈춤을 경험하고 있다. 이 멈춤이 야기할 경제적 난국에 대한 우려 가운데에도, 멈춤의 때에 꼭 돌아보아야 할 것들이 있다. 그나마 있던 서비스마저 중단된 중증 장애인들에게 격리는 불편을 넘어 방치와 고통을 뜻한다. 2019년 디지털 정보격차 실태 조사에 따르면 저소득층, 고령층 등의 정보 활용 역량은 일반인의 60.2%에 불과하다고 한다. 싱가포르의 외국인 노동자 감염 확산 보도를 보며, 우리는 200만명 이상의 외국인, 40만명 추산의 불법체류자들을 위해 어떤 조치를 하고 있는지 걱정된다.
국제경제와 과학기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코로나19를 극복하고 다시 달려야 한다. 그러나 브레이크의 성능이 따라주지 않는데 엔진만 믿고 속도를 높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백미러와 사이드미러에 사각지대는 없는지 확인하는 것도 필수적이다. 어쩔 수 없이 주어진 멈춤이지만, 그것을 꼭 필요한 멈춤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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