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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공자(孔子)가 자신의 도가 하나로 꿰어져 있다고 말하자 증삼(曾參)은 그것이 충(忠)과 서(恕)를 가리키는 것임을 간파하였다. 서(恕)는 공자가 자공(子貢)에게 평생의 좌우명으로 준 글자이기도 하다. 그런데 오늘날 일상에서 활용되는 어휘가 ‘용서(容恕)’밖에 없을 정도로 서(恕)는 사라져 가는 글자가 되고 말았다. 서(恕)는 남의 마음도 나와 같으리라는 점을 헤아려서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않는다는 의미를 지녔다. 상대의 잘못을 벌하지 않고 덮어 준다는 ‘용서’의 현대적 의미보다 훨씬 외연이 큰 말이다.
용서를 미덕으로 강조할 때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게 있다. 자신이 피해자가 아닌 한, 용서를 함부로 말해선 안된다는 점이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는 명령은 인간이 인간에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용서라는 말을 꺼내는 순간, 피해자에게는 더 큰 상처가 되고 가해자에게는 면죄부를 얻는 기회가 되기 십상이다. 가해자가 당연히 받아야 할 처벌을 온전히 받을 수밖에 없게 된 상황에서 피해자로서 가해자 역시 나와 같은 사람이었다는 점이 깊이 와 닿을 때, 비로소 피해자 스스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용서다.
미성년자를 포함한 여성들을 협박해 성 착취 동영상을 찍고 이를 인터넷에서 회원제로 유포한 사건이 공분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일말의 서(恕)라도 있다면 차마 할 수 없을 행위를 자행하는 데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사이버라는 창문 너머의 익명성에 숨어 그것을 즐겨왔다는 사실에 치가 떨린다. 자신의 쾌락을 위해 다른 사람의 삶이 파괴되는 것을 개의치 않는 이들은 이미 서(恕)의 대상도 아니다. 한편으로는 이것이 그동안 대수롭지 않게 간과되어 온 문화 위에서 탄생한 괴물이라는 점에서 남성의 일원으로 자괴와 참회를 금할 수 없다.
이와 유사한 사건들이 한때 충격을 주었다가 잊히곤 해왔음을 상기한다. 이번에 제대로 처벌하지 못한다면 이 괴물은 더 흉측한 몰골이 되어 다시 나타날 것이다. 취할 수 있는 가장 넓은 대상에 대한 가장 강력한 처벌을 촉구한다. 추호의 용서도 허용하지 않는 것, 이번 일에서는 그것이 진정한 서(恕)의 실현이다.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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