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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신당역 스토킹 살인 사건. 지난달 도시 한복판에서 여성 역무원이 남자 동료에게 스토킹당하다 결국 무참히 살해당했다. 현 여성가족부 장관은 극구 아니라고 부정하지만, 이 범죄는 명백히 젠더 관련 폭력이며 여성혐오와 무관하지 않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정말 살아남은 여성들은 운이 좋았을 뿐인가. 현재까지도 우리 사회의 많은 여성들은 집 밖에서 불안에 떨며 조심조심 보통의 하루를 살아간다. 거리에서 일터에서 지하철에서 마음 졸인 여자들이 어디 한둘인가. 그럼 집 안은 안전한가. 그럴 리가! 일상에서 은밀하게 친밀하게 폭력이 자행되는 닫힌 공간, 집 그리고 여성의 공포. 그래서 수많은 문학 작품에서 집 안에 갇혀 미치거나 자살하는 여자들이 등장하는 것일까.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의 ‘다락방의 미친 여자,’ 지난 칼럼에 썼던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의 시니코 부인,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와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 맨부커상을 받은 한강의 <채식주의자>의 영혜도 마찬가지다. 아버지에게 맞고 자란 그녀는 가부장제 폭력에 저항하기 위해 극단적인 채식주의자가 되고 음식을 거부하며 죽어간다. 이들은 모두 남성중심주의에 의해 정신이 짓이겨진 비극적인 여성들이다. 미국의 샬럿 퍼킨스 길먼의 단편 ‘누런 벽지’(1892)의 이름 없는 화자도 정신이 무너진다. 작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이 고딕소설은 가부장제와 결혼이 어떻게 여자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고 파괴하는지 섬뜩하게 그려낸다.

주인공은 의사 남편과 함께 휴양을 위해 오래된 저택에 머문다. 아이를 낳고 우울증을 앓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라는 남편은 언뜻 다정하고 아내를 아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의사와 남편의 권위를 내세워 사람들을 못 만나게 하고, 아내가 좋아하는 글쓰기도 금지시킨다. 흉측한 누런 벽지가 싫다고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는 남편. 결국 그녀는 누런 벽지가 있는 방에 갇히고, 감옥의 쇠창살 같은 벽지를 뜯어내며 미쳐간다.

백인 중산층인 주인공은 풍족한 삶을 사는데, 왜 불행할까. 남편은 자신의 건강을 걱정하고 자상한데, 그녀는 왜 울면서 무서워할까. 그녀는 왜 ‘다락방의 미친 여자’가 되어갈까. 이유는 간단하다. 가부장적인 남편과 갇힌 집. 집 안의 무소불위 권력자 남편은 모든 의사결정에 독단적이고 아내를 통제하고 억압하며 가스라이팅을 한다. 아내는 집 안에 갇혀 외부와 단절되고, 집은 소름 돋는 감옥이 된다. 어떻게 미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 사회의 여성들은 130년 전에 쓰인 ‘누런 벽지’의 여주인공으로부터 얼마나 달라졌을까. 물론 여성의 삶이 전보다 나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친밀한 공간에서 공포를 느끼는 여자들이 있다. 남편의 말을 듣지 않으면 자신과 아이들에게 신체적 폭력을 휘두를지 모른다는 두려움. 정서적 폭력은 또 어떤가. 가장 흔하지만, 폭력으로 인식되지 않는 통제들, 강요들, 폭언들. 사랑으로 가장한 억압과 정서적 폭력 속에서 크고 작은 공포는 겹겹이 쌓이고, 여성의 정신은 짓이겨진다. 도망칠 수 있을까. 자신을 지킬 수 있을까.

남편의 완력, 주먹과 발은 경찰의 발보다 빠르다. 남편의 정서적 학대와 억압은 경찰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오늘은 또, 헤어지자는 아내를 한낮 거리에서 흉기로 살해한 남편에 관한 기사를 읽었다. 집 밖에 나오기 위해 여자는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 그리고 나오면 신당동 역무원의 운명이 기다릴지도 모른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공포는 여성들이 자주 느끼는 감정이다. 그리고 여전히 우리 사회는 뿌리 깊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가 손을 뻗치지 않는 곳이 없으며 우리의 정신을 옥죄고 있다. 상황이 이럴진대, 현 정부는 여성가족부를 폐지하는 정부조직개편안을 확정했다고 한다. 정말 어이가 없다.

<윤선경 한국외국어대 영어통번역학부 교수>

 

 

연재 | 문화와 삶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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