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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경부선 상행 기차를 타면 웃는다. 20년 전 처음 그 기차를 탔을 때 지은 웃음은 드디어 고향을 탈출한다는 승리의 의미였지만, 이제는 그냥 열차에 앉아 있는 승객들의 모습이 웃겨서 웃는다. 부산에서 출발해 대구를 지날 때까진 분위기가 느슨하다. 

‘우리가 남이 아니’기 때문일까? 아무튼 동대구역까진 ‘서울아 기다려라 내가 간다!’ 같은 출세지향적 설렘이 있다. 그러다 열차가 대전역에 도착할 즈음 사람들은 시계를 본다. 출발한 지 1시간40분이 지났다. 그런데 아직 대전이라니? 내가 생각보다 서울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음을 깨달으며 피로가 급격히 몰려온다. 충청도의 문이 열리고 말투가 전혀 다른 사람들이 빈자리를 모두 채운다. 객실이 만원이 되면 계절에 상관없이 열기가 차서 숨 쉬기가 어려워진다. 그때부턴 기차를 탄 사람들이 서로를 격렬히 싫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티를 내진 않지만 머리 위로 말풍선이 떠 있다. ‘인간들 전부 서울 가네? 자기 고향 안 지키고?’

비장했던 열차 안의 침묵은 천안을 지나 광명에 도착하며 조금씩 누그러진다. 광명은 경기도다. 하지만 이미 열차를 2시간50분이나 탄 사람들에게 경기도는 서울이나 다름없다. 그래야만 한다. 나는 광명에서 평소 피곤하게 여겼던 MBTI 성격 유형 검사를 믿기로 한다. 특정 MBTI를 가진 사람들은 이때 짐칸에서 가방을 찾거나 외투를 챙겨 팔에 감는다. 특정 MBTI를 가졌거나 광명역에서 서울역까지 30분 정도가 더 걸린다는 걸 아는 사람들은 성질 급한 사람들을 째려보며 고단함을 느낀다. 특정 MBTI를 가진 나는 그 두 그룹의 신경질적인 모습을 비웃으며 일부러 더 느긋하게 음악을 듣는다. 어떤 MBTI가 더 짜증나는지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순간이다.

광명을 떠난 열차 안에는 곧 최종 목적지인 서울역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구로와 영등포를 지나며 도시의 심란한 풍경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도심에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의 얼굴이 예민해진다. 바람을 조용히 가르던 열차의 소음에 조금씩 시끄러운 쇳소리가 더해질 때 드디어 창밖에 한강이 보인다. 바로 그 순간이 경부선 상행 열차의 하이라이트다. 한강을 가로지르며 보이는 파노라마는 그곳을 일상에서 마주하는 서울시민들에게도 번번이 새삼스럽게 황홀한 풍경이다. 그러나 서울행 열차에선 이 객관적인 아름다움을 거부하고 창밖에 시선을 뺏기지 않으려 고개를 돌린 승객들이 종종 있다. ‘이런 강은 우리 동네에도 있다. 다들 서울 처음 오나?’ 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 너무 좋아서 한강과 그들을 번갈아 본다. 대도시를 겪으면서 생긴 정체 모를 두려움과 그 두려움에 맞서기 위해 기른 퉁명스러운 자존심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다.

한강이 보여주는 낭만은 열차가 다리의 북쪽 끝에 도착하고 강변에 지어진 고층 아파트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면 금세 차갑게 식는다. 이 풍경을 우리집 창으로 보기 위해 나 역시 고향을 떠나 이 열차를 탄 것일까? 설령 내가 ‘한강뷰’ 아파트에 살고 싶은 욕망이 없다 해도 서울은 늘 ‘능력이 없어 그런 욕망조차 못 갖는 건 아니고?’ 하는 의심을 품게 만드는 곳이었다.

열차가 서울역에 도착하면 이곳이 고향이 아닌 승객들은 티가 난다. 그들은 굳은 표정을 한 채 일부러 더 씩씩하게 걸으며 서울의 어딘가로 흩어진다. 열차 안에서 함께 나누었던 정체 모를 감정 역시 이름도 붙이지 못한 채 쓸쓸하게 한강에 방류된다. 그것을 아쉬워할 틈도 없이 서울의 시간은 바쁘게 흐르고 어느덧 고향으로 가는 하행 열차를 탄다. 하행 열차에선 한강이 언제 창밖에 지나가는지, 열차 안의 사람들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 모른다. 그저 영혼이 쉴 수 있는 곳으로 간다는 안도감에 취해 쏟아지는 잠을 누릴 뿐이다.

<복길 자유기고가·<아무튼 예능> 저자>

 

 

연재 | 문화와 삶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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