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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마다 잊지 않고 사 모으는 게 있는데 에코백 천가방이다. 도시의 이름이나 어디 서점, 음반점 로고가 새겨진 에코백. <북회귀선>의 헨리 밀러나 <채털리 부인의 연인> 작가 로렌스의 이름이 새겨진 에코백. 길에서 누군가 메고 가는 에코백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작가나 화가, 가수의 이름과 도시가 새겨진 에코백을 만나면 무지 반갑다. 명품 가죽 가방도 하나쯤 뭐 좋겠지만, 거창하게 지구환경까지 말하고 싶진 않고, 에코백이 건강하고 멋져 보인다. 정성을 다해 직접 손바느질로 에코백을 만들어 들고 다니는 부인들도 있다. 따봉 따봉, 엄지손가락 척~.

요새는 해외 고급 백화점과 서점마다 필수로 에코백 판매대를 두고 있다. 일회용 포장, 비닐을 줄여 보자는 취지일 것이다. 실용성 말고 패션의 지위로까지 높이 올라가는 분위기다. 젊은 치들이 명품 백을 휘두르는 건 별로 곱게 보이지 않는다. 엄마 걸 들고나온 것도 아닐 테고 말이다. 소매치기가 득시글거리는 샹젤리제나 몽마르트역 어디도 아닌데 철심 줄로 친친 감긴 가방을 가슴에 움켜쥐고 다닐 필요까지야. 책 한 권 들어가지 못할 가방을 들고 다니는 것은 무식을 온 천하에 자랑하고 다니는 거나 마찬가지. 젊음의 자랑은 돈이 아니라 건강미와 지성미. 누구는 그것이야말로 섹시미, 야하다고 말했던가.

마광수 교수를 뵌 것은 가수 한대수 사진전으로 기억한다. 하얀 천조각에 아크릴 물감으로 그린 그림이 앞자루에 박힌 에코백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진한 스모키 화장을 한 일행도 수줍은 얼굴이었는데 스치듯 다른 일행들 속에 파묻혔다. 윤동주처럼 창백한 얼굴을 가진 마광수 샘은 학원에서 쫓겨나 감옥이나 외진 식당을 전전하며 지냈다. 그가 들고 다닌 가방 중에 하필 그 에코백의 기억을 내가 지닌 것은 무슨 때문일까. 그 속에 어떤 책과 또 시가 담겨져 있을까 궁금했었다. 다소 커 보이는 상의를 걸친 구부정한 어깨선. 붉은 매니큐어를 칠한 사라를 좋아한다 말했던 눈빛은 누구보다도 솔직했다. 검열을 피해 다급히 적고 또 찢었을 노트에는 같이 ‘콩밥을 먹은 문장들’이 슬픈 나체로 누워 있었겠다. 문학 선생의 에코백을 찢어 콘돔이라도 하나 주운 자들이 내지른 비명들로 세상은 소음천지, 위선의 진풍경이었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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