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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으로는 여행프로나 좀 보고 라디오를 즐겨 듣는다. 요새 방송사가 파업 중이라 재방송이 많다. 책을 다시 읽으면 별미인 것처럼 파업 때문에 듣는 재방송이 그리 싫지만은 않다. 방송이 볼 게 없으면 아껴두었던 영화를 한 편 찾아봐도 되고 말이다. 며칠 전엔 영화와 여행을 좋아하는 친구가 안겨준 선물로 두 눈이 호강했다. 아바스 키아로스타미와 켄 로치, 나막신의 감독 에르마노 올미 이들 셋이서 쿵닥쿵닥 만든 옴니버스 영화 <티켓>. 1등석 2등석 3등석, 칸마다 다른 군상들. 로마로 가는 짜릿하고 낭만적인 기차 여행. 가슴이 홍시처럼 붉어지고 달콤해졌다. 파업도 종종해야 하겠다. 그때는 이처럼 놓칠 뻔한 영화를 찾아볼 기회가 생길 테니까.

수다스러운 라디오도 잠시 끄고, 듣고 싶었던 노랠 찾아들어도 좋겠다. 총리 아저씨 말씀마따나 보다 공정한 뉴스를 찾아들어도 좋겠다. 윗선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는 메인 앵커에게 물 좀 아끼라 했다고 수년간 일거리 없는 ‘옆방’에서 지냈다는 선배 기자의 증언. 이도 워터게이트라 하던가. 나이 들고 볼품없는 사람들도 가을이 되면 단풍이 들까. 휘황한 햇빛만 믿고 안하무인이 되어버린 추한 군상들. 세상이 온통 적폐로 몸살을 앓고 있다. ‘파업전야’ 노래가 동네방네 쩌렁쩌렁 울리고 있다.

새로움만을 좇는 세상에 재방송을 듣는 즐거움. 개봉영화가 아니라 흘러간 영화를 찾아보는 즐거움. 겁 없는 오르막길보다 내리막길을 주의하고 조심하는 지혜로운 사람들은 이런 ‘힘 빼기의 기술’을 잘 안다. 카피라이터 김하나씨의 에세이 <힘 빼기의 기술>도 참 재미나게 읽었다. 제목부터가 나를 화끈 홀렸다. “주삿바늘 앞에 초연한 엉덩이처럼 힘을 빼면 삶은 더 경쾌하고 유연해진다.” 일본의 유명 극작가인 구도 간쿠로의 인터뷰를 소개하고 있는데, “바쁜 와중에 각본을 그리 잘 쓰시는 비결이라도?” 대답인즉슨 “일단 잘 쓰고 싶지 않아요”. 백지 앞에서 부푸는 욕심, 잔뜩 들어간 힘을 빼는 순간 명문장이 찾아드는 것일까. 올해 추석명절은 아주 긴 휴식기로 달콤하겠다. 힘을 빼는 재방송 시간. 기운을 빼고 뒤를 돌아보며 두루두루 살펴보는 귀한 시간들이길.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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