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왜 더 저항하지 못했나” “왜 즉시 신고하지 않았나” “피해를 당하고도 어떻게 일상을 이어갈 수 있었나”. 성폭력 피해자들이 흔히 듣는 질문들이다. 유독 성폭력 피해자에게만, 응당 그래야 할 것 같은 사회적 통념, 즉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는 것이다. 증인이나 물증이 없는 성폭력 사건에서는 피해자 진술을 얼마나 믿을 수 있느냐가 유무죄 판단의 중요한 근거가 되는데 여기서 피해자다움이 신빙성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작용하고 있다.

범죄정책 연구자인 닐스 크리스티는 이상적인 피해자상이 있다고 주장한다. 피해자가 약할수록, 당시 도덕적으로 좋은 일을 하고 있었다고 여겨질수록, 위험회피 노력을 했을수록, 가해자와 전혀 모르는 관계일수록, 가해자가 완력이 세고 악한 사람일수록 그 피해자는 이상적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이 피해자다움의 영역에서 벗어난 경우 피해자로 인정받기 힘들다. 무고죄를 넘어 꽃뱀으로 몰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성추행 피해자가 무고죄로 기소됐다 투쟁 끝에 무죄를 확정받은 과정을 주제로 한 논문 ‘너 같은 피해자를 본 적이 없다:성폭력 피해자 무고죄 기소를 통해 본 수사과정의 비합리성과 피해자다움의 신화’는 피해자다움의 벽이 얼마나 높은지를 생생히 보여준다. 피해자다움이란 말이 주목받은 것은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비서 폭행 사건 1심 판결 때이다. 피해자답지 않은 행동을 했다는 것이 안 전 지사 무죄 판결의 주된 근거였다. 하지만 한국성폭력상담소가 8만여건의 성폭력 상담 사례를 분석해 내린 결론은 비슷한 피해라도 가해자와의 관계나 상황 등에 따라 피해자의 반응은 다르다는 것이다. 성폭력이라고 다른 범죄와 특별히 다른 게 없다는 말이다.

대법원이 16일 성추행 피해자가 피해자답지 않다는 이유로 가해자에게 무죄를 선고한 판결이 부당하다고 판단했다. 편의점 본사 직원이 여성 편의점주인 피해자의 머리를 만지고 강제로 볼에 입을 맞췄는데, 1심과 달리 항소심은 무죄로 뒤집었다. 편의점 폐쇄회로TV 영상 속에서 피해자가 종종 웃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이 판단이 잘못됐다며 항소법원으로 돌려보냈다. 피해자다움이란 없다는 것이 새로운 사회통념이다.

송현숙 논설위원


 

 

오피니언 여적 - 경향신문

 

news.khan.co.kr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