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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여적]고종의 길

opinionX 2018. 8. 1. 14:24

아관파천(俄館播遷)의 역사 기록은 소략하다. 임금이 궁궐을 1년이나 비워놓고, 집권세력이 교체됐으며, 대한제국을 태동시킨 계기를 마련했던 사건치고는 의아할 정도다. 불과 122년 전의 일인데도 말이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실록 등 여러 사료를 종합한 <고종시대사>(1896년 2월11일 조)에는 “이범진 등 친러파의 계획에 의하여 이날 새벽에 군주가 태자와 함께 비밀리 정동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移御)했다”고 되어 있다. 개인 역사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황현은 ‘이범진 등이 교자 두 개를 세내어, 왕과 태자를 러시아 공관으로 옮겼다’(<매천야록>)고 했다. 정교는 ‘궁녀의 교자를 타고 건춘문을 빠져나갔다’(<대한계년사>)고 썼다.

한말, 어수선한 시기에 임금이 도망치듯 거처를 옮기다 보니 사관들이 놓친 것일까. 외세에 기댄 떳떳하지 못한 역사여서 소극적이었을까. 어쨌든 고종이 경복궁에서 어떤 경로로 정동의 러시아공사관으로 갔는지는 아직까지 오리무중이다. 건춘문이 아니라 영추문이라는 설도 있다. 작은 단서는 있다. 한말 미국공사관이 제작한 정동 지도에 표기된 ‘King’s road(왕의 길)’가 그것이다. 미국공사관 북쪽 담장을 따라 동서로 그어진 ‘왕의 길’. 문화재청은 지도 속의 이 길을 고종의 파천 길로 추정한다.

문화재청이 아관파천 피신로의 일부를 복원해 ‘고종의 길’이라는 이름으로 1일 공개한다. 8월 한 달간은 시범 개방하며 10월부터는 상시 열린다. ‘고종의 길’은 덕수궁 돌담길에서 옛 러시아공사관이 있던 정동공원까지 모두 120m다. 미국공사관 지도의 ‘왕의 길’과 겹친다. 고종의 길은 옛 덕수궁 부지 안에 있다. 최근까지 미국대사관저 경내에 있던 것을 선원전 복원을 위해 되찾은 덕수궁 터에 새로 길을 닦았다. 복원을 앞둔 덕수궁 옛터에는 1930년대 일본풍의 ‘조선저축은행 중역 사택’이 남아 있다. 10월 전에 철거돼 이번 임시 개방 때에만 볼 수 있다. 새 길이 열리면서 덕수궁~돌담길~고종의 길~정동 공원의 코스는 새 명소가 될 것 같다. 도심을 거닐며 궁궐의 정취도 느끼고 역사의 교훈도 새겨보자. 지난해 영국대사관 구간의 덕수궁 돌담길 일부를 되찾은 시민들은 1년 만에 다시 ‘고종의 길’을 선물로 받았다.

<조운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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