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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의 시간은 시속 20㎞로 가고 60대의 시간은 시속 60㎞로 간다는 말이 있다. 시간, 즉 지구의 자전과 공전 속도는 일정하지만 그 속도를 느끼는 감각은 세대에 따라 다르다. 시대에 따라서도 다르다. 속도감은 생리적 감각이라기보다는 문화적 감각이다.
1908년 기차를 처음 타본 최남선은 ‘경부철도가’를 지어 그 감동을 표현했다. “우렁차게 토하는 기적 소리에 남대문을 등지고 떠나 나가서 빨리 부는 바람의 형세 같으니 날개 가진 새라도 못 따르겠네.” 당시 기차의 최고 속도는 시속 30㎞ 정도였다. 이 정도 속도면 ‘빨리 부는 바람의 형세’와 비슷하기는 하다. 빠른 것을 ‘바람 같다’고 표현하던 때였으니, 인간이 그보다 빠르게 이동하는 시대가 오리라고 상상하기는 어려웠을 터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서울에서 운행하는 자동차가 10대도 안 되던 1915년 7월22일,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는 ‘자동차취체규칙’을 제정, 공포했다. 제한 최고 속도는 시내에서 15마일, 기타 지역에서 20마일이었다. 과속 감지기도 없던 때였으나, 제한 속도를 위반할 수 있는 차량은 없었다. 인도와 차도가 구분되지 않아 우마차와 사람과 차량이 뒤엉켜 다녔기 때문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레일도 없는 길에서 굴러가는 자동차의 속도에 놀랐다.
탈것의 속도만 문제가 아니었다. 이른바 ‘신문물의 시대’가 도래한 이후 수십년간, 사람들은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하는 데에 불편함을 호소했다. 특히 도시 사람들은 거리에 나설 때마다 보이는 ‘새로운 것’들을 이해하는 데에 애를 먹었다. 하지만 새로운 것들의 이름과 용도를 모르고서는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고 살 수 없었다. 새로운 것들을 알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도시민의 책무가 되었다. 구두끈 매는 법, 넥타이 매는 법, 전차표나 극장표 끊는 법, 전화 거는 법 등 새로 얻어야 하는 ‘앎’이 있었을 뿐 아니라, 도로 위를 걷거나 횡단하는 법, 관청에 민원 넣는 법, 모르는 사람에게 말 거는 법 등 과거의 것을 바꿔야 하는 ‘앎’도 있었다. 그런데 이런 ‘앎’들은 대체로 책을 보며 사색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많은 것들이 조건반사적 반응을 요구했다. 한 가지 정보를 채 소화시키기도 전에 또 다른 정보를 입수해야 했기에, 사람들의 감각 기관은 늘 피로했다. 1920년대까지, 신경쇠약은 당대의 ‘현대병’이었다.
사람은 적응하는 동물이다. 처음에는 빠른 속도를 견디지 못했으나, 이윽고 그 속도감이 일상적 감각으로 바뀌었다. 1930년대 중반부터, 빠른 속도는 불편함이 아니라 찬미의 대상이 되었다. 비행기, 고속정, 자동차 등 공기나 물의 저항을 줄여 빠른 속도를 얻기 위해 만들어진 탈것의 형태, 즉 유선형(流線型)이 가장 아름답고 현대적인 도형으로 각광받았다. 사람의 몸도 유선형으로 가꿔야 한다는 담론이 널리 유포되었다. 빠른 속도에 당황하던 사람들은, 점차 느린 속도에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문명화를 고속화와 같은 뜻으로 이해했다. 새로운 물건들이 나오는 주기가 더 짧아지는 것, 기존 탈것들의 속도가 더 빨라지는 것, 육상·수영 등 스포츠 경기 기록을 단축하는 것이 모두 인간과 세계의 발전으로 취급되었다. 그 시대의 신문물은 더 이상 특별하지 않았다. 물질세계의 태반은 이미 신문물이 차지하고 있었으니, 그런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신기록이었다.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20여년간, 사람들은 부득이 신기록에 대한 욕망을 접어야 했다. 특히 6·25전쟁으로 전국이 폐허화한 뒤에는 하루빨리 과거로 복귀하는 것, 즉 ‘재건’이 시대의 과제였다. 무너진 건물과 시설만 재건의 대상이 아니었다. 속도감도 재건해야 했다. 1970년 경부고속도로 개통은 속도의 시대가 재건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 이후 사람들은 다시 계속 빨라지는 속도, 계속 단축되는 기록에 익숙해졌다.
이제 빠름만 미덕이고 늦음은 악덕이다. 30분 이내 배달을 약속하지 않는 음식점, 1일 배송을 약속하지 않는 홈쇼핑 업체는 문 닫을 각오를 해야 한다. 빠른 속도감에 익숙한 사람들은 ‘기다림’을 견디지 못한다. 약속 시각보다 조금만 늦어도 배달원을 타박하고, 주문한 지 몇 시간 되지 않아 배송 상태를 조회한다. 약속 시각이 되기도 전에 휴대전화기를 꺼내 드는 것이 현대인의 습성이다.
세상 모든 것의 운동 속도가 느리던 시절에는 판단도 기다렸다가 했다. 멀리 보이는 사람이 피해야 할 상대인지 반갑게 맞아야 할 상대인지는, 그가 가까이 다가오길 기다려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초고속 시대인 현대에는 기다림이 곧 망설임이요, 망설임은 위험이다. 100m 떨어진 곳에서 달려오는 자동차를 발견하고 망설이는 것은 자살 행위다. 현대인은 보자마자 판단하고, 판단과 동시에 움직이는 습성을 기른 사람이다.
조급증과 속단은 현대의 시대병이요 현대인의 고질병이다. 자동차 운전석에서 차가 막힌다고 짜증을 내는 것이나 상황이 생각만큼 빨리 바뀌지 않는다고 불평을 하는 것이나, 모두 마음속의 ‘기준 속도감’이 초고속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가짜뉴스가 판을 치는 것도, 사람들이 생각 없이 판단하는 데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요즘 사람들은 개혁의 설계도에 대해서는 별로 궁금해하지 않으면서, 달라지는 속도가 느린 것만 불평한다. 새로 들은 뉴스가 사실인지 곰곰이 따지지는 않고, 덜컥 믿거나 무턱대고 배척한다. 고속 성장의 시대는 지났다. 불평한다고 지구의 자전 속도가 빨라지지는 않는다. 사람의 속도감에 세상의 변화를 맞출 수는 없는 법이다. 이제 우리의 속도감을 바꿔야 할 때이다. ‘늦음’에도 나름의 아름다움과 미덕이 있다. 천천히 움직이고 찬찬히 생각하는 게, 심신의 건강에 더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전우용 |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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