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복싱은 ‘욱’하는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자극하는 스포츠이다. 고대 그리스의 투사들은 밧줄에 매인 채 돌 위에서 마주 앉아 어느 한 편이 녹다운 될 때까지 주먹으로 쳤다. 로마시대 전사들은 주먹보호를 위해 감싼 가죽끈에 쇠징을 박았다. 가죽끈은 훗날 ‘사지 찌르기’라는 의미의 흉기인 미르멕스로 변질됐다. 전사가 죽어나갈 때까지 진행되던 야만의 이벤트는 기원전 393년 무렵 공식폐지됐다. 권투가 다시 등장한 것은 17세기 영국이었다. 야만적이라는 비판 때문에 몇 가지 ‘문명적인 룰’을 만들기 시작했다. 다운 뒤 30초 중단, 글러브 사용 의무화, 1회 3분 후 1분 휴식 룰 등….

1889년 7월8일 미국 미시시피주 리치버그에서 벌어진 존 설리번과 제이크 킬레인의 대결은 인류 최후의 맨주먹 싸움이었다. 설리번은 킬레인의 강공에 크게 고전하다 44라운드 들어 토하기까지 했다. 킬레인의 승리가 예감됐지만 반전이 벌어졌다. 설리번이 75라운드까지 버티자 견디다 못한 킬레인 측이 수건을 던졌다. 둘 다 얼굴이 엉망이 된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혈투였다. ‘맨주먹 챔피언’인 설리번은 3년 뒤 글러브를 낀 신식대결에서는 무너지고 만다. 상대인 짐 코빗의 아웃복싱에 농락당해 21회 KO패 한 것이다. ‘신사의 룰’로 무장한 복싱은 이후 100년 가까이 인간의 결투본능을 대리충족시키면서 히트 스포츠로 발전했다.

프로복싱 신인王전 최종예선_경향DB


하지만 인기에 취한 복서들은 사각의 링에 갇혀 안주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매니 파퀴아오와 플로이드 메이웨더 주니어의 ‘세기의 졸전’은 추락한 복싱의 현주소를 웅변한다. 그러니 식상한 팬들은 강한 자극을 찾아 종합격투기 등으로 시선을 돌린다. 국내 사정은 더 암담하다. 1980년대부터 가짜복서가 등장하고, 편파판정 시비로 해외까지 망신살이 뻗치는 등 악재만 쌓였다. 여기에 배고프고 힘든 복서생활을 기피하는 풍조까지…. 최근엔 아마 대표선수들까지 오는 8월 리우올림픽 출전권이 걸린 예선전에서 줄줄이 탈락했다. 1948년 런던올림픽 이후 68년 만에 올림픽 출전이 좌절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어떻게 해야 복싱의 인기를 회복할 수 있을까. 야만의 시절로 돌아가 글러브를 벗고, 죽을 때까지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이니 모두 지혜를 모을 필요가 있다.


이기환 논설위원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5/0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