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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파리시는 도심개발로 원주민이나 상인이 동네를 떠나는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기승을 부리자 2006년 ‘파리도시계획’을 내놨다. 파리 전체 도로 길이의 16%인 259㎞를 ‘보호상업 지구’로 지정해 3만여개 상점의 임차인들이 건물주의 횡포로 쫓겨나지 않도록 했다. 파리시는 상가 임대차계약 갱신 기간을 9년으로 정하고, 건물주가 계약을 해지하려면 임차인의 귀책사유를 제시하도록 했다. 건물주가 재건축을 할 때는 임차인에게 우선적으로 입주권을 부여해야 한다.

독일은 민법으로 상가 임차인의 권리를 보호하고 있다. 상가 임대차계약은 10년 이상 보장하고, 계약 기간이 만료되더라도 임차인이 원하면 계약을 연장할 수 있다. 임대료 인상폭도 소비자물가 상승률의 60~100% 이내로 제한한다.

경찰이 임대료 인상을 놓고 다툼을 벌이다 건물주에게 둔기를 휘두른 서울 종로구 서촌 ‘본가궁중족발’ 사장 김모씨를 9일 구속했다. 아내와 함께 2009년 서촌에 족발집을 연 김씨는 2016년 1월부터 건물주와 갈등을 빚었다. 건물주가 리모델링을 명목으로 임대 보증금을 3000만원에서 1억원으로, 월세는 297만원에서 1200만원으로 4배 넘게 올려 달라고 요구한 게 발단이 됐다. 김씨가 임대료 인상을 거부하자 건물주는 명도소송을 제기해 승소했고, 법원 명령으로 건물을 강제 집행하는 과정에서 12차례나 물리적 충돌을 빚기도 했다.

건물주에 대한 김씨의 폭행은 정당화될 수 없다. 하지만 이번 사건의 배경에는 독일·프랑스 등 선진국처럼 상가 임차인의 권리를 보장해주지 못하는 불합리한 법과 제도가 놓여 있다.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 풍자를 넘어 ‘갓(god)물주의 나라’가 된 한국 사회의 비극이기도 하다. 현행 상가건물임대차보호법은 계약기간 5년이 넘으면 건물주가 임대료를 수십배 올리거나 계약 갱신을 거부해도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도록 규정돼 있다.

국회에는 임차인의 계약 갱신 청구 기간을 10년으로 늘리는 법률 개정안이 발의돼 있지만 2년째 처리되지 않고 있다. 숨만 쉬고 있어도 돈을 번다는 ‘갓물주’들이 법과 제도의 허점을 노려 임차인을 울리는 한국 사회는 ‘갑과 을의 상생(相生)’을 말할 자격이 없다.

<박구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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