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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여적]비극의 사이판섬

opinionX 2018. 10. 30. 11:00

미국령 북마리아나 제도에 속해 있는 사이판은 서태평양의 코발트빛 바다에 박혀 있는 작은 보석 같은 섬이다. 울창한 열대 우림과 눈부신 백사장, 깎아지른 절벽이 환상적인 이 섬은 한국에서의 비행시간이 4시간 정도여서 한국 관광객들에게도 인기가 많다. 1990년대에는 신혼여행지로 각광을 받았고, 요즘도 연간 20만명의 한국 관광객이 찾는다.

제26호 태풍 ‘위투’가 강타한 미국령 북마리아나제도 사이판에서 25일(현지시간) 건물 지붕들이 강풍에 뜯겨져 나갔다. 연합뉴스

사이판의 필수 관광코스 중 드넓은 태평양을 조망할 수 있는 ‘자살절벽’이라는 곳도 있는데, 사연이 끔찍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4년 6월11일 미군은 B-29 폭격기로 일본 본토를 타격하기 위한 비행장을 확보하기 위해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이 섬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6만6000여명의 미 해병이 전함 수백 척의 화력 지원을 받으며 일본군 3만1000여명이 지키던 섬에 상륙했다. 일본군의 저항은 처절했지만 미군의 압도적인 화력을 당해내지 못했다. 7월7일 살아남은 4300여명의 일본군은 최후의 자살 돌격(옥쇄공격)을 감행했다. 그리고 일본군 최후의 사령부가 있던 마피산의 정상 가파른 절벽에서 수많은 일본군과 민간인들이 미군의 항복 요구에 응하지 않고 투신자살을 했다. 이 절벽이 바로 ‘자살절벽’이다.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해안가 절벽에서도 많은 이들이 투신을 했는데, 이곳도 ‘만세절벽’이라는 이름이 붙은 관광지다. 당시 두 절벽에서 투신한 이들은 1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민간인 상당수는 일본군의 강압으로 뛰어내렸다고 한다. 천혜의 아름다운 관광지에 전쟁의 무서운 비극이 숨어 있는 것이다.

사이판에 지난 25일 슈퍼 태풍 ‘위투’가 몰아치며 그야말로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시간당 최대 풍속이 290㎞로 미국 본토나 미국령을 강타한 폭풍 중 1935년 이후 가장 강력한 위력이다. 곳곳에서 나무나 차량은 물론, 주택까지 날아갔고 수도, 전기망이 파괴됐다. 사망자와 수백명의 이재민도 발생했다. 사이판 공항도 파손돼 항공기 이착륙이 불가능해지면서 한국인 관광객 1700여명이 고립됐다. 다행히 정부가 지난 27일부터 군수송기를 보내 관광객들을 수송하고 있고, 28일부터는 일부 민항기도 운항이 재개돼 이들 모두 조만간 귀국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김준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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