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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구속된 전 법원행정처 차장 임종헌에 대한 구속영장에는 ‘양승태 대법원’ 당시 법원행정처가 더불어민주당 의원인 유동수의 2심 재판 전략을 짜줬다는 혐의가 적혀 있다. 유동수는 1심에서 당선무효형에 해당되는 벌금 300만원을 선고받았다. 2심에서 벌금 90만원이 나와 의원직을 유지했다. 특허 무효제도를 도입하려던 특허청장을 국정감사장에서 혼내달라는 요청을 유동수가 수행한 대가로 법원행정처가 재판 전략을 써 제공한 것이다.

임종헌은 상고법원 법안을 발의한 자유한국당 의원 홍일표에게도 ‘법률 서비스’를 제공했다.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와 관련해 검찰 수사를 받을 때 임종헌이 법원행정처 양형위원회 판사에게 대응 전략을 짜주라고 지시한 혐의도 영장에 적혔다. 사법농단 사태에서 다시 확인한 건 ‘양승태 대법원’이 전방위로 ‘대형 로펌’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이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8년10월30일 (출처:경향신문DB)

임종헌이 2015년 11월 작성한 ‘상고법원의 성공적 입법추진을 위한 BH와의 효과적 협상추진 전략’ 문건엔 스스로 이익집단이 되거나 이익집단 대변자를 자처하는 대법원의 자기 선언이 들어 있다. 임종헌은 청와대의 비협조로 상고법원 도입이 좌절되면 “사법부로서도 더 이상 BH(청와대)와 원만한 유대관계를 유지할 명분과 이유가 없다는 점을 명확히 고지해야 함”이라고 썼다. “법이 언제나 판매 대상이며, 대체로 최고가격을 제시한 입찰자의 편에 선다”(미국 법학자 프레드 로렐)는 진단에 부합한다. 최고가격(상고법원 도입)을 내놓지 않는다면, 편들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이 문건에서 읽었다.

임종헌은 청와대 비협조를 쓴 대목의 ‘BH 국정운영기조를 고려하지 않는 독립적, 독자적 사법권행사 의지표명’ 제목 앞에 ‘압박카드’라 적고 꺾쇠 부호로 감쌌다. ‘양승태 대법원’에 사법부 독립은 그 어떤 경우에도 지켜야 할 절대 가치가 아니라 집단 이익을 위해서는 취하거나 버릴 수 있는 카드였다.

자본의 이익에 복무하며 ‘사법 상인’으로도 불리는 대형 로펌의 속성을 ‘양승태 대법원’에서도 확인한다. ‘양승태 대법원’ 당시 기획조정심의관이자 현 울산지법 부장판사인 정다주가 임종헌 지시로 작성한 ‘정부운영에 대한 사법부의 협력 사례’엔 KTX 승무원 사건, 콜텍·쌍용차 정리해고 사건, 철도노조 파업 사건에서 사측 편을 든 사례가 ‘노동개혁에 기여할 수 있는 판결’로 올랐다. 항소심을 뒤엎은 대법원 판결로 KTX 승무원 한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014년 11월 대법원이 “해고는 무효” 판결을 파기하지 않았다면, 쌍용차 노동자와 그 가족의 27·28·29·30번째 죽음은 없었을지 모른다.

바른미래당 의원 채이배가 최근 내놓은 <사법농단 의혹 사건 인명 사전> 발간사 첫머리에 한 말은 “지난 20년간 재벌개혁 운동을 해 오면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부분 중 하나가, 우리 사법부가 유난히 재벌 총수에게 관대하다”이다. 사법부가 노동조합 위원장 관련 재판에서 ‘산업역군’의 대표로 경제발전에 이바지한 점을 고려해 관대하게 선처한 사례를 들은 적이 없다.

사법농단은 조직 이기주의를 넘어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정경유착과 유전무죄 이데올로기에 맞닿아 있다. 삼성전자 부회장 이재용과 롯데그룹 회장 신동빈이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난 데서 세상을 지배하는 현실의 법칙, 경제·사회적 토대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다.

로펌은 입법·행정부와 공공기관에서도 찾을 수 있다. 정의당은 삼성전자 기흥공장 이산화탄소 누출사고와 삼성전자서비스 노조 와해 사건, 가습기 살균제 사건을 두고 이재용과 SK 회장 최태원 등 총수를 증인으로 불렀지만 여당과 다른 야당의 합의로 무산됐다. 박근혜 정권 때 재벌 비판에 앞장섰던 여당은 이번 국감에서 재벌 방패막이로 나섰다. 재벌개혁 목소리는 사라지고, 그 빈자리에 ‘일자리 창출’과 ‘경제발전’ 명목의 ‘기업 살리기’가 부활했다.

‘양승태 대법원’을 대형 로펌에 비유했지만, 대형 로펌은 불법·범죄 행위를 변호할 뿐, 스스로 범죄와 불법의 주체로 나서는 건 아니다. 임종헌 구속은 ‘양승태 대법원’의 불법과 범죄를 처벌하는 출발점으로 이어져야 한다. ‘양승태 대법원’ 단죄로 끝날 일은 아니다. ‘관료화’ ‘엘리트주의’ ‘전관예우’ ‘유전무죄’의 사법 불신을 구조적·제도적으로 개혁하는 일이 남아 있다. ‘촛불’ 이후 소수의 사법·행정 관료와 재벌, 기득권 정치세력·언론이 그들의 이익을 위해 다수의 시민·노동자를 지배하는 체제 문제를 청산했는지도 되돌아볼 때다.

29일은 민주공화국을 기치로 박근혜 퇴진에 나선 촛불집회 2주년이 되는 날이다.

<김종목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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