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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칼럼

[여적]선거철 출판기념회

opinionX 2018. 3. 14. 14:51

1997년 7월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에서 박노해 시인의 에세이 <새벽에 길어올린 한 생각>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천주교 인권위원회가 마련한 출판기념회에선 황지우 시인이 축시를 낭송하고, 가수 장사익·정태춘·박은옥이 축하공연을 했다. 출판기념회는 각계 인사 300여명이 참석할 정도로 성황을 이뤘지만 정작 책의 저자는 없었다. 당시 박 시인이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책은 출판기념회를 통해 세상에 나온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는 1998년 12월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서간문집 <이희호의 내일을 위한 기도>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현직 대통령 부인의 출판기념회여서 정·관계 인사와 문인, 여성계 인사 등 1000여명이 모였다. 이 여사의 출판기념회는 책의 출간을 알리려는 목적보다는 당시 외환위기 여파로 어려움을 겪던 서민들을 돕기 위한 일종의 ‘모금 행사’ 성격이 짙었다. 실제로 이 여사의 인세 수입과 출판기념회 수익금 전액은 불우이웃돕기에 쓰였다.

출판기념회는 저자와 지인들이 집필의 고통과 출간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행사다. 하지만 선거철에 정치인들이 여는 출판기념회는 선거자금 모금수단이 된 지 오래다. 올해도 6·13 지방선거를 앞두고 정치인들의 출판기념회가 기승을 부렸다. 선거에 나서는 후보들에게 출판기념회는 ‘선거 밑천’을 마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하지만 후보에게 눈도장을 찍어야 하거나 이른바 ‘보험’을 들어야 하는 이들에겐 출판기념회 초대장이 ‘현금 납부 고지서’나 다름없다. 정치인 출판기념회에서 책값으로 수천만원을 내도 공직선거법이나 정치자금법, 부정청탁금지법에 저촉되지 않는다. 더구나 회계장부를 남기거나 신고해야 할 의무조차 없다.

400쪽짜리 책 100권이 만들어질 때마다 30년 된 나무 한 그루씩 사라진다고 한다. 정치인 출판기념회에서 정가보다 수십~수백배 많은 돈을 내고 구입한 함량미달의 책들은 쓰레기통에 버려지기 일쑤다. 정치인들에게 ‘책에 대한 예의’를 갖추라고 당부하고 싶다. 그렇지 않으면 ‘책 모독 금지법’ 제정을 위한 입법 청원운동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박구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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