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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백제 무왕)과 신라 선화공주의 사랑 이야기는 <삼국유사> ‘무왕조’에 등장하는 설화다. 서동이 경주 시내에 동요를 퍼뜨려 평소 연모했던 공주를 얻은 뒤 익산에 공주를 위한 절(미륵사)을 지었다는 설화를 의심하는 이들은 없었다. 걸핏하면 으르렁댔던 백제의 왕자와 신라의 공주 간 국경을 넘은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믿고 싶었을 것이다. 딸의 혼인을 결사반대했던 진평왕이 절의 창건에 기술자를 보낸 영호남 화합의 메시지까지 담겨 더욱 그랬을 것이다. 여기에 아버지의 가없는 딸사랑까지 보탰으니 이처럼 탄탄한 이야기 구조가 또 없다.
그런데 2009년 1월 이 철석같은 믿음이 깨졌다. 미륵사지 서탑에서 ‘절을 세운 이는 좌평(16관등 중 첫번째) 사택적덕의 딸인 백제왕후’라고 새긴 사리봉안기를 발견한 것이다. 선화공주가 아닌 사택왕후가 절의 주인공이라면 <삼국유사> 내용은 새빨간 거짓이라는 얘기다. 역사고고학계는 큰 혼란에 빠졌다. 안타깝지만 ‘선화공주=가공인물’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소리도 나왔다. 하지만 미륵사가 3개의 절을 합친 구조라는 점을 착안한 색다른 주장도 제기됐다. 동서의 절은 백제 출신인 사택왕후가, 가운데 절은 선화공주가 세웠다는 것이다. 선화공주와 사택왕후는 무왕의 두 부인이었다는 주장이다. 관심의 초점은 무왕과 선화공주의 부부묘로 알려진 익산 쌍릉으로 옮겨갔다.
미륵사지 석탑은 해체 전(위) 형태를 최대한 유지해 2017년 보수 완료(아래)할 계획이다._문화재청 제공
이 쌍릉에서 최근 또 한번 학계를 ‘멘붕’에 빠뜨릴 발굴결과가 나왔다. 쌍릉 중에서도 무왕묘로 추정된 대왕묘에서 20~40대 성인 여성의 치아 4점이 확인된 것이다. 신라계통으로 추정된다는 등잔도 나왔다. 목관의 재질과 무덤 구조가 부여 능산리의 백제왕 무덤 형식과 같다는 점에서 심상치 않다. 주인공의 신분이 최소한 왕족급 여성이라는 것이다. 일부 전문가들이 “7년 전 ‘가공인물’로 폄훼되어 이미지에 큰 손상을 입었던 선화공주가 부활한 것 아니냐”며 흥분할 법도 하다.
그러나 낙관은 금물이다. 선화공주가 쌍릉 가운데 대왕묘의 주인공이라면 소왕묘에 묻힌 이는 누구인가. 남편인 무왕은 대체 어디에 묻혔는가. 다시 한번 치열한 토론의 장터가 열려야 할 것 같다. 학계는 애간장이 녹는다. 선화공주는 허구인가, 실재인가.
이기환 논설위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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