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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번역본 <열하일기>(보리)를 읽다보면 “이날 밤 달이 찢어지게 밝았다”는 표현이 종종 보인다. 원문을 찾아보니 ‘是夜月益明’이다. 한국고전번역원 이가원 번역본에는 “이날 밤에는 달이 유난히 밝았다”로 돼 있다. ‘익(益)’자를 각각 ‘찢어지게’와 ‘유난히’로 옮겼다. 북에서 ‘찢어지게’는 ‘몹시 대담하게’라는 의미다.(<조선말대사전>). 남과 북이 나란히 번역한 조선시대 실록을 비교하면, 차이는 확연하다. <리조실록>은 잘 읽히는 반면 <조선왕조실록>은 전문가를 위한 번역으로 가독성이 낮다.

북한의 고전 번역은 ‘인민대중을 사상적으로 교화시킨다’는 목표에서 출발했다.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일상어·토속어를 즐겨 사용한다. 그러나 대담하고 파격적인 의역이 많아 원문의 뜻이 전달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반면 남한의 번역은 학자들의 연구를 위한 기초 자료를 제공하기 위해 시작됐다. 그래서 원문의 뜻을 훼손하지 않으려고 직역 위주다.

북한의 고전 번역은 국가사업으로 시작됐다. 사회과학원 중심으로 1950~1960년대 이미 <열하일기> <목민심서> 등 번역서 수십종을 출간했다. 월북한 홍기문·김석형 등의 국학자들이 번역을 이끌었다. 남한은 민간에서 출발해 정부 주도로 옮아갔다. 1965년 설립된 민간 법인 민족문화추진회가 초기 번역사업을 이끌었다. 2007년부터는 이를 모태로 출범한 한국고전번역원이 고전 사업을 지휘한다. 이곳에서 지금까지 나온 국역서는 259종 2000여권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북한이 우리 고전 번역을 선도했다. 조선 실록 완역도 북한이 먼저였다. 그러나 북한이 번역 후속세대를 기르지 못하면서 1990년대 들어 남한에 추월당했다.

한국고전번역원이 엊그제 북한에 <승정원일기>의 공동 번역을 제안했다. <승정원일기>는 실록과 쌍벽을 이루는 역사고전이다. 실록의 4배나 되는 방대한 분량으로, 세계기록유산에도 올라 있다. 번역원이 24년째 <승정원일기>에 매달리고 있으나 실적은 전체의 22%에 불과하다. 오랜 번역 전통을 가진 북한이 참여하면 완역은 크게 앞당겨질 것이다. 번역 과정에서 민족 문화를 공유하며 동질성도 찾게 될 것이니 일석이조가 아닐 수 없다. 북한의 화답을 기대한다.

<조운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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