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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까. 요령 없이 성실하기만 한 남편을 만났던 처녀 시절까지 닿기는 너무 멀까. 그는 자신의 처음을 어디로 해야 할지 망설였다. 아이 셋을 낳아 키우면서 틈틈이 반찬값이나 벌자고 했던 일들을 처음이라 하기에는 번잡할까. 그뿐만 아니라 집집마다 아이들을 서넛씩 키우던 시절에 여자들은 너나없이 손을 놀리지 않았다. 미용 기술을 배운 이는 야미로 동네 아줌마들 파마를 말아 솔찬히 돈벌이를 했고, 재봉질 좀 해 본 이는 온종일 커튼이고 옷이고 쌓아놓고 드르륵드르륵 박아댔다. 그는 방에 앉아 한 달 내내 붙이고, 떼고 해봤댔자 유명 메이커 운동화 한 켤레 못 사 신기는 일을 수없이 했다. 그렇지만 세상이 그런 일을 번듯한 노동으로 인정하지 않듯 그도 구구절절 얘기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처음을 남편이 십 년 넘게 하던 가게를 접었을 때로 뒀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빈손으로 돌아와 갈팡질팡하는 남편 대신 그가 세상으로 나가야 했다. 남편의 끝이 그의 시작이었다. 그는 재래시장에서 물건을 떼다가 식당에 납품을 하기도 했고, 직접 장사를 하기도 했다. 돌을 놓는 바둑판이라면 어떨지 모르지만, 그가 몸으로 부딪쳐 깨우친 인생의 정석은 없었다. 이쯤이다 싶으면 악수이거나 헛수이기 쉬웠다. 그러니 그에게 인생은 바둑판이 아니라 계단이었다. 아무리 올라서도 끝이 보이지 않는.

그래도 자식들은 잘 자라줬고, 세월은 잘도 흘렀다. 자식들이 밥벌이를 한 뒤에도 그는 일을 쉬지 않았다. 술집 주방에 나가 새벽까지 안주를 만들었으며, 빌딩 청소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얼마 전부터 동네 아파트 청소일을 시작했다. 집에서 가까우니 좋고 오전에만 하면 되니 안성맞춤이었다.

“주민 민원이 들어왔다면서 이 더위에 신주를 하라(황동에 광 내라는 의미)는 거야. 아파트 소장은 일하는 사람 얘기는 들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하라네.”

111년 만의 폭염이 예고된 날 아침, 그는 계단 끄트머리에 댄 황동을 광내면서 계단을 올랐다. 나는 지금껏 숱하게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빛나는 황동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것을 빛낸 이의 땀 흘린 삶을 고마워하지 않았다.

<김해원 |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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