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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여론조사가 선거에 본격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중반부터다. 최병렬 전 한나라당 대표는 민정당 국책연구소 부소장 시절 자신과 김행 연구원이 가장 먼저 여론조사 기법을 도입했다고 여러 차례 술회한 바 있다. 그 국책연구소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 자유한국당의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원이다. 하지만 아무리 과학적인 기법을 도입했다 해도 여론조사가 매번 정확할 수는 없다. 2002년 16대 대선 당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숨어 있는 5%’를 믿었다가 낭패를 본 것이 대표적이다.

선거에서 여론조사가 주목받는 것은 기정사실화 효과 때문이다. 특정 후보 지지세가 확인되면 표가 그쪽으로 쏠리는 경향이 있다. 한국에서는 투표일 6일 전부터 여론조사 공표가 금지된다. 그러니 후보들로서는 대세론이 고착화하는 것을 막기 위해 ‘깜깜이 기간’ 전에 여론조사 지지율을 끌어올리는 데 목매지 않을 도리가 없다. 선거관리위원회가 설문 방법과 문항 전체를 공개하도록 강제한 것도 문항을 조작하거나 수치를 보정해 지지를 유도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이다. 이번 선거에서 선관위 기준을 위반한 여론조사가 118건에 달한다고 한다. 여론조작 의심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지지율 높이기에 나선 후보들의 절박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최근 여론조사에서는 조작보다 여론조사 기법의 한계가 더 눈에 띈다. 10%에도 미치지 못하는 응답률이 정확성을 크게 떨어뜨리고 있다. 여기에 확증편향 심리까지 더해지면 말할 것도 없다. 16대 대선 막판 이회창 캠프에 합류했던 윤여준 전 의원은 “대선 보름 전 승부는 기울어 있었다. 여론조사가 과학이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이 후보가 결코 이길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회고했다.

한국당 홍준표 대표가 5일 “방송사들이 왜곡된 여론조사로 우리 지지층이 아예 투표를 포기하게 하려고 난리 치고 있다”고 주장했다. 전날 방송 3사 여론조사 결과 국회의원 재·보선이 치러지는 12곳에서 한국당 후보가 전패하는 것으로 나오자 여론조작 가능성을 제기한 것이다. 여론조사의 기정사실화 효과를 차단하기 위한 방책이다. 드러난 표는 무시하고 숨은 표만 찾는 것은 한국 보수의 전통인가.

<이중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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