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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벨기에 브뤼셀의 유럽연합(EU)과 유럽의회를 방문했다. 의회 곳곳을 안내하던 관계자가 메인 프레스룸 입구에 적힌 이름을 가리키며 “누군지 아느냐”고 물었다. Anna Politkovskaya(안나 폴리트코프스카야). 총격으로 목숨을 잃은 러시아 독립언론 ‘노바야 가제타’의 기자다. 폴리트코프스카야는 체첸 전쟁 당시 러시아군의 인권유린을 고발하는 등 러시아 정부 비판 기사로 명성을 얻었다. 용기있는 탐사보도로 수많은 언론상을 받았으나 2006년 10월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머리와 가슴에 총상을 입은 채였다. 살인범 5명은 유죄 선고를 받았지만 배후는 밝혀지지 않았다. EU 출입기자와 유럽의회 의원들은 기자정신을 기려 공식 브리핑이 열리는 프레스룸을 ‘안나 폴리트코프스카야 룸’으로 명명했다.
러시아의 언론환경은 엄혹하다. 블라디미르 푸틴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인들이 의문의 죽음을 맞거나 누명을 쓰고 체포되는 사례가 잦다. 2009년 ‘노바야 가제타’의 아나스타샤 바부로바 기자가 총에 맞아 숨졌다. 지난해에는 푸틴 정부의 ‘시리아 용병 파견’ 의혹을 파헤쳐온 ‘노비 덴’의 막심 보로딘 기자가 자택 발코니에서 추락사했다. 러시아는 최근 국경없는 기자회(RSF)가 발표한 ‘2019년 세계 언론자유 지수’에서 조사 대상 180개국 중 149위를 기록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러시아 온라인 매체 ‘메두자’의 탐사보도 전문기자 이반 골루노프가 지난 6일(현지시간) 마약 소지·거래 혐의로 체포됐다. 그러나 골루노프의 소변검사에선 마약성분이 검출되지 않았다. 법원은 이례적으로 구속영장을 기각하고 두 달간의 가택연금 명령으로 대신했다. 언론은 지면을 통해 골루노프에 대한 연대 의사를 표명했다. 베도모스티·코메르산트·RBC 등 3개 일간지는 10일자 1면을 일제히 ‘나/우리는 이반 골루노프다’라는 헤드라인으로 장식했다.
폴리트코프스카야는 살해당하기 1년 전 운명을 예감한 듯 이야기했다. “위험은 내 일의 일상적 부분이 됐다. 하지만 내 임무를 멈출 수는 없다.”(BBC 인터뷰) 위험을 무릅쓰고 진실을 추구하는, 세계의 모든 기자는 ‘이반 골루노프’요 ‘안나 폴리트코프스카야’다.
<김민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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