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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상사와의 갈등을 겪느라 우울증에 빠진 사람이 있었다. 그가 회의 시간에 상사에게 소위 ‘바른말’을 한 적이 몇 번 있었는데, 그것이 문제의 시작이었다. “주변에서 동료들이 너 한 번만 더 그러면 완전 찍힌다고 경고했을 때 그만뒀어야 한다는 걸 압니다. 하지만 그게 잘 안됐고 결국 마지노선을 넘고 만 거죠.”

그는 그때부터 상사의 교묘한 괴롭힘이 시작됐다 했다. 어느 날은 터무니없게 짧은 시간 안에 한꺼번에 일을 끝내 놓으라 했다가 또 어느 때는 프로젝트에서 아예 배제하는 식이었다. 동료들도 그의 처지를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대놓고 이의 제기를 하지는 말라고 충고했다. 시간이 흐르면 상사도 지칠 테니 그때까지 참는 것이 진짜 용기 있는 행동이라는 것이었다. 그 역시 그렇게 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문제는 그 모든 것을 참아내는 것이 너무도 힘들다는 점이었다. 

“요즘은 퇴근해서 집에 있는 동안에도 아내나 아이들에게 신경 쓰는 것보다 그 인간 미워하느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형편이에요. 처음엔 그런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죠. 어느 날 아내가 콕 집어서 지적해 주기 전까지는요. 아내가 그러더군요. 자기한테도 말하기 힘들면 상담을 받아보는 게 좋겠다고요.”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가 실제 일어난 일보다 훨씬 격렬한 감정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특히 분노라는 한 가지 감정에만 몰두하다 보니 그 감정을 필요 이상으로 계속해서 확대하고 증폭시켜 온 것이었다. 그는 매우 분노한 채로 마음속에 쌓여 있던 감정들을 여과 없이 다 쏟아냈고, 그것만으로도 아주 후련한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우리 내면의 부정적인 감정들이 얼마나 자주 실제보다 어마어마하게 부풀려지는지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그는 비로소 자신도 그러한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그것이 문제를 더 악화시켰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물론 그의 사례는 조금도 예외적인 것이 아니다. 나를 포함해 누구라도 그런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생물체다. 그리고 생물체는 어떤 상황에서도 외부 환경에 반응하는 존재다. 따라서 힘든 일이 있으면 고통스럽고, 좋은 일이 있으면 기쁘고, 불쾌한 일이 있으면 화가 나고, 무서운 것이 있으면 공포를 느끼게 마련이다. 다만 거기에 더해 그런 감정을 확대하고 증폭시키는 매개체가 있으니, 그 존재가 바로 나 자신이다. 계속해서 그 생각에만 골몰함으로써 자신도 모르게 상황을 더욱 나쁜 쪽으로 몰아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상황에 맞는 감정을 제대로 이해함으로써 그 감정에 압도되지 않는 것이 우리의 정신건강에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기쁨, 우울, 불안, 두려움, 분노 등의 감정은 그것을 겪어내는 일이 힘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을 생생하게 느끼게 하는 원천이기도 하다. 또한 상황에 어울리는 적절한 감정들은 내가 무엇 때문에 힘들어하는지, 어떤 것 때문에 상처를 잘 받는지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는 지표가 되어 준다. 특히 그런 감정들을 경험함으로써 우리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하지 않을 수 있고, 따라서 불편한 감정을 덜 경험하는 지혜를 쌓을 수도 있다. 한편으로 일어난 상황보다 지나치고 부적절한 감정은 우리의 이성을 마비시켜 충동적 행동을 하게 만들기도 한다. 따라서 상황에 맞는 감정을 적절하게 습득하는 것이야말로 곧 우리의 정신건강을 유지하고 인간관계를 잘 맺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인 것이다.

또 하나, 때때로 우리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다 표현하는 것이 솔직한 행동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외부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여과 없이 모두 받아들인다면 아마도 우리의 뇌는 그 상황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감정 역시 마찬가지다. 일정한 시간을 두고 일정한 여과 장치를 거친 다음 표현하는 쪽이 훨씬 더 지혜로운 행동이다. 그에 관해서라면 저 옛날 아리스토텔레스도 이미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있다. 

“도덕적인 인간이란 적절한 감정을 적절한 때에 적절하게 전달하는 사람이다.”

<양창순 | 정신과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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