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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칼럼

[여적]험지와 텃밭

opinionX 2019. 11. 6. 10:48

“지역구도 때문에 영남 대통령이 호남에 가면 구의원도 안되고, 호남의 대통령은 이 부산에 오면 구의원도 되지 않는 이런 정치가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라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2000년 16대 총선, ‘정치 1번지’ 서울 종로를 던지고 부산에서 다시 도전에 나선 ‘바보 노무현’의 절절한 호소다. 배타적 지역주의 속에서 영남과 호남은 양대 정당에는 서로 ‘텃밭’과 ‘험지(險地)’로 교차됐다. ‘막대기만 꽂아도 당선되는’ 텃밭과 ‘대통령이 출마해도 구의원도 안되는’ 사지(死地) 지역구, 한국 정치의 오랜 질곡이다.

경기 군포에서 내리 3선을 한 김부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2012년 지역주의 타파를 내걸고 ‘험지’ 대구 출마를 선언, 연거푸 고배를 마셨지만 20대 총선에서 당선되어 대선주자 반열로 부상했다. 박근혜 정권 시절 실세 이정현 의원은 2014년 재·보선에서 호남 지역구(전남 순천)에 도전, 당선돼 최초의 호남 출신 새누리당 대표에 올랐다. ‘험지’ 도전은 위험한 선택이지만, 성공했을 때 정치적 위상을 일거에 높일 수 있다. ‘바보 노무현’처럼 실패했을 때도 정치적 힘을 얻을 수 있다. 분명한 것은, 공히 등 떠밀려 나가는 게 아니라 스스로의 결단에 의했을 때다.

‘험지 출마’는 2016년 20대 총선을 앞두고 새누리당이 꺼낸 카드다. 당시 김무성 대표가 중량급 인사들에게 공개 권유하면서 등장했다. 애초 자발성에 기반하기보다 선거 전략과 계파 견제 차원에서 꺼내진 ‘험지 출마론’은 결국 숱한 논란만 낳았을 뿐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당시 이 카드로 나선 오세훈(서울 종로)과 안대희(서울 마포갑)는 모두 낙선했다. ‘선거 공학’으로 짜인 험지 출마 전략이 얼마나 무력한 것인지를 입증했을 뿐이다.

반면교사도 못한 것일까. 자유한국당이 다시 험지 출마론을 두고 술렁대고 있다. 텃밭으로 꼽는 영남과 서울 강남 지역의 중진 의원과 지도급 인사들이 ‘험지’에 출마하라는 요구가 드세지자, 당사자들은 재빨리 ‘텃밭’ 지역구 못 박기에 나서면서 엇박자다. 고난이라곤 겪어보지 않은 ‘온실의 화초’들에게 거친 들판은 공포의 대상일 것이다. 애초 헌신과 희생이라는 유전자가 없는 이들에게 험지는 ‘나는 싫지만 네가 나가서 뺏어오면 나도 좋은 지역구’일 뿐이다.

<양권모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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