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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동원 한반도평화포럼 명예이사장이 19일 서울 63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자서전 출판기념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임동원(1933~). 구순을 맞는 이 원로는 지난 세기 격동의 한반도 역사의 주요 무대 뒤에 서 있었던 ‘한반도의 포레스트 검프’라 할 수 있다. 일제하 평안북도에서 태어난 그는 고교 재학 중 6·25 전쟁이 터지자 월남했다. 기독교 장로였던 부친의 영향으로 공산주의에 동의할 수 없었던 그는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해 군인이 됐다. 육사 교관으로 쓴 저서 <혁명전쟁과 대공전략>은 박정희 정권의 방첩 교과서였다. 이런 ‘반공’ 의식과 이스라엘군에서 접한 ‘자주국방’은 평생의 신조였다. 역대 최대 규모 군비증강 사업인 ‘율곡계획’을 입안한 것도 그였다.
신군부 쿠데타 후 그는 하나회의 반대편에 섰다는 이유로 군복을 벗어야 했다. 외교관 생활을 하다 1987년 민주화 후 외교안보연구원장으로 복귀한 그는 군축전문가, 협상가로 거듭났다.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와 비핵화공동선언을 이끌어냈고, 김대중과 빌 클린턴의 대북정책을 조화시켜 2000년 첫 남북정상회담을 만들어냈다. 그가 자서전 <다시, 평화>에서 북측 협상 상대를 두고 “친구도 아니고 적도 아닌 문제해결사들”이라고 지칭한 것은 ‘협상가 임동원’을 상징한다.
그의 삶은 부친에게 배운 합리적 보수의 길을 걸어온 역사라 할 수 있다. 자서전에 이런 내용이 있다. “(고향) 마을에 귀신 들린 난폭한 농인 하나가 철사에 묶여 지냈는데 가끔 철사를 끊고 벌거벗은 채 읍내로 달려오곤 했다. 사람들이 몽둥이를 휘둘러 마을 밖으로 몰아내려고 하면 그는 포위망을 뚫고 우리 집으로 달려왔다. 아버님은 그를 반갑게 맞아 목욕을 시키고 새 옷을 입히고는 기도해 주고 음식을 배불리 먹여 그의 집까지 데려다주곤 했다. 신기하게도 그는 아버님 앞에서는 항상 순한 양같이 되었다.”
북한 비핵화가 요원하고 긴장 고조로 치닫는 작금의 한반도 상황을 임동원은 어떻게 볼까. 자서전 끝에서 그는 예나 지금이나 ‘미국의 결단’이 한반도 문제 해결의 열쇠라는 점을 상기하면서도 한국은 계속해서 평화 프로세스를 추진해야 한다고 말한다. “평화가 전부는 아니지만, 평화 없이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의 자서전 출판기념회가 열린 19일 남북한 군은 포성을 주고받는 데 여념이 없었다.
<손제민 논설위원 jeje17@kyunghyang.com>
오피니언 | 여적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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