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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여적

[여적] 다문화 총리

opinionX 2022. 10. 26. 09:40

리시 수낵 영국 총리 내정자가 24일(현지시간) 영국 런던 보수당사 앞에서 손을 흔들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해 영국에서 인도 독립 75주년을 앞두고 마하트마 간디를 기리는 5파운드 기념주화가 만들어졌다. 힌두교 명절 디왈리에 즈음해 공개된 이 동전에는 연꽃 그림과 ‘내 삶이 곧 메시지’라는 간디의 책 제목이 새겨졌다. 힌두교는 영국에서 1~2%에 불과한 소수종교이고, 인도계 이민자 역시 인구의 2~3%를 차지하는 소수인종이다. 기념주화 제조를 주도한 사람은 당시 재무장관이던 리시 수낵이다. 

수낵은 25일 찰스 3세 국왕의 임명을 받아 57대 총리에 취임했다. 영국 의원내각제 301년 역사상 첫 비백인·비기독교도 총리다. 보수당 소속이지만, 진보 매체 가디언에서도 “다문화, 다종교 사회 영국의 이정표”라는 평가가 나왔다. 수낵의 뿌리가 있는 인도의 시민들은 물론 영국의 인도계 이민자들도 환호했다.

수낵은 1980년 5월 영국 사우샘프턴에서 인도계 이민 가정 3세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동아프리카의 영국 식민지에서 태어난 인도계로, 1960년대에 영국으로 이주했다. 조부모는 2차 세계대전 전인 1930년대에 인도에서 케냐로 이주했다. 이러한 가족사는 영국 제국주의 말기 피식민지인들의 이주 흐름을 잘 보여준다. 일제강점기에 한반도에서 가난과 차별을 피해 만주로 건너갔다가, 일본으로 이주한 조부모를 둔 재일 조선인 3세와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수낵은 BBC 인터뷰에서 어린 시절 동생들과 식당에서 인종차별을 당했던 경험이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고 말했다. 그런 그의 총리 취임은 그 자체로 역사적 사건임에 분명하다. 그럼에도 역설적 측면이 있다. 수낵은 계급적으로 최상층에 속한다. 의사·약사였던 부모 밑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아 성공한 금융업자가 됐고, 인도 재벌가와의 혼인을 통해 1조원 넘는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최대 아이러니는 세계화의 ‘승자’들 중 한 명인 그가 세계화의 ‘패자’들의 지지를 받으며 브렉시트를 주도하고 집권을 이어가는 보수당 정권을 이끌게 됐다는 점일 것이다. 지난 7월 첫 당권 도전 때 이민자 강제추방 요건을 대폭 완화하겠다고 공약하는 등 이민 정책에서 극우에 가까운 입장을 보여준 것이 단적인 예다. 정치인이 자신의 출신 배경을 정면 부정해야 하는 것만큼 역설적인 일이 있을까.

<손제민 논설위원 jeje1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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