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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현지시간)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의 챔피언스 골프클럽에서 열린 제75회 US여자오픈 골프 대회 4라운드 3번 홀에서 한국의 김아림(25)이 티샷을 하고 있다. 이 대회에 처음 출전한 김아림은 최종 합계 3언더파 281타로 1위에 올라 우승했다./AP 연합뉴스

1998년 7월7일 이른 아침, 21세 박세리가 신발과 양말을 벗더니 성큼성큼 연못으로 걸어 들어갔다. 두 발을 물에 담근 채 기적 같은 샷을 날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탈출했다. 이어 연장·재연장 살얼음 승부 끝에 기어이 우승을 따냈다. 미국여자프로골프 최고 권위의 메이저 대회인 US여자오픈 53회 대회 때 일이다. 까맣게 탄 종아리와 새하얀 맨발이 유난히 대비됐던 그 장면은 그해 정부가 제작한 ‘대한민국 50주년’ 공익광고에 들어갔다. “깨치고 나가 끝내 이기리라”는 노래 ‘상록수’와 함께. 박세리는 올 5월 인터뷰에서 “지금 보면 무모한 도전이었지만, 그때는 진짜 도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2020년 12월15일 새벽, 이번에는 25세 김아림이 겁 없는 도전에 나섰다. 미국 텍사스주에서 열린 75회 US여자오픈 대회 마지막 날, 따라잡기 불가능해 보인 5타 차 열세를 뒤집고 챔피언에 올랐다. 세계랭킹 94위의 선수가 코로나19 영향으로 대회 출전 랭킹 제한이 완화된 덕에 행운의 기회를 잡아 생전 처음 나간 미국 대회, 그것도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한 것이라 더 대단하다.

김아림은 대회 기간 닷새 내내 마스크를 쓴 채 경기를 펼쳤다. 그는 “내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상황이라 불편해도 마스크를 쓰고 연습했다”고 말했다. 외신들은 최대한의 예방책을 실천한 김아림이 코로나19 시대에 가장 기억에 남을 챔피언의 모습을 보였다며 찬사를 보냈다. 그의 트레이드마크는 환한 미소다. 자신감 넘치는 시상식 소감도 더욱 김아림을 돋보이게 했다. “오늘은 웬만하면 핀(깃대)을 보고 쏴야겠다고 각오했는데 생각대로 잘됐다.”

2020년 김아림은 1998년 박세리를 많이 닮았다. 우승을 결정한 마지막 홀, 버디를 낚은 뒤 주먹을 불끈 쥐고 기뻐한 세리머니가 우선 비슷했다. 또 박세리가 눈부신 맨발로 시름에 잠긴 외환위기 시국에 희망을 주었다면 김아림은 빛나는 마스크와 미소로 코로나19를 떨칠 용기를 북돋웠다. 김아림은 “내 플레이가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고 좋은 에너지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코로나19 대유행으로 모두가 지치고 우울한 이때, 그가 새로 선물한 명장면을 떠올리면 좋겠다. 모두 씩씩하게 용기 낼 수 있도록.

차준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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