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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책임져라”, “장관 사퇴하라”, “국민 앞에 사죄하라”. 무슨 일이 터지면 흔히 들리는 목소리다. 야당이 즐겨 쓰는 공격무기다. 언론도 나서고 국민청원도 등장한다. 어떤 잘못에 대한 책임인지도 모르면서 장관이 경질되고, 최고 지휘라인이 사퇴하면 일단 진정된다. 연대책임을 묻고 문책성 인사로 사태를 마무리한다. 그렇다고 재발이 방지되나. 성범죄에 관한 한 전혀 그렇지 않다. 적어도 군대 내 성범죄가 그렇다. 온갖 제도와 장치를 마련하고 예방 교육도 강화했건만 잊을 만하면 또 터진다. 성범죄 피해 여군이 자살하는 비극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불과 몇 해 전에는 남성 장교로부터 준강간 당한 여군 장교가 목숨을 끊는 일도 있었다. 군 성폭력 피해자가 자살로 내몰리지만, 국방부와 군 당국은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대책을 발표하고 개선 의지를 천명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효과도 없는 종합대책만 반복하니 육·해·공군을 가리지 않고 군대 인권과 성평등은 뒷걸음질뿐이다.

군대 내 성범죄 축소·은폐율이 특히 높다. 사건 발생에서 은폐까지 거의 똑같은 수순이 반복된다. 알리면 왕따 당하거나 가해자와 부대원의 보복이 기다린다. 성범죄 처리 과정에 대한 불신도 크다. 그러니 피해자는 피해를 드러내거나 알리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피해를 당해도 참고 견딜 수밖에 없다고 체념하는 여군이 대부분이다. 물론 남성 군인도 마찬가지다. 드러난 범죄 건수보다 숨겨진 범죄가 더 많다. 암수(暗數)가 얼마인지 모르지만, 빙산의 일각이다. 군대 내 성범죄에 대한 정확한 피해조사도 없고, 공개되지도 않지만 그럴 것으로 추정된다. 위계질서와 폐쇄적 조직의 특성 때문이다.

그 이유뿐일까. 왜 축소하고 은폐하려 할까. 왜 상부에는 거짓 보고를 할까. 끊이질 않는 성범죄 발생의 원인으로 군 사법 체계의 문제, 젠더 감수성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남성 중심문화, 실효성 없는 처벌, 시늉만 내는 예방 교육 등을 꼽지만, 무엇보다도 연대책임과 문책성 인사에 그 원인이 있다. 성범죄가 발생하면 부대가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부대 전체에 인사상 불이익이 가해진다. 지휘관 승진탈락은 확정적이다. 그러니 부대장은 일단 밖으로 알려지지 않게 단속하고, 은폐하거나 축소를 시도하는 것이다. 성공하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휘관은 승진·영전하고 부대는 일상을 되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피해자 회유와 은폐 시도가 먼저다. 피해자를 보듬고 가해자를 찾아 절차에 따라 처리하는 대응이 뒷전인 이유다.

성범죄가 발생하면 일벌백계의 엄포를 놓는다. 한 명에게 본보기로 벌을 주면 백 명에게 경계하는 효과를 노릴 수 있다는 의미다. 그렇게 겁준다고 범죄가 예방될까. 그렇지 않다. 정상적인 상황에서 이성적인 인간이라면 그럴 수 있다. 범죄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익과 그로부터 받을 불이익을 비교해 득실을 따져보면 당연히 후자가 클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의 참맛을 아는 사람이라면 당연하다. 교도소에 갇혀 사는 자유 박탈의 불이익이 눈앞의 욕구를 밀어낸다는 가설이 심리적 강제설이다. 그래서 사형제도를 버리지 못한다. 사형의 범죄억지력이 크다고 믿기 때문이다. 어려운 용어로 형벌의 위하력(威 力), 겁주기 효과다. 공개처형이 이런 효과를 노리는 것이다.

문제는 사람들이 항상 이성적이거나 합리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그래서 범죄는 발생한다. 또 중벌이 두려우면 발각되더라도 무마하려 든다. 딱해서 봐주기도 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하다가 걸리면 봐달라고 뇌물을 건넨다. 은폐나 축소 시도가 앞선다. 처벌범위가 넓어도 그렇다. 연대책임을 묻는 조직이 그렇다. 조직의 구성원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서 장에게 인사상의 불이익 등 책임을 지운다면 대개는 은폐하거나 축소하려 들 것이다. 실제로 절차에 따라 잘 처리한 예를 찾아보기 힘들다.

군대, 경찰 등 위계질서가 있는 곳이면 대개 그렇다. 그 위계질서가 사실은 연대책임의 범위이기 때문이다. 장성 승진을 앞둔 부대장이나 경무관 승진이 코앞인 경찰서장이 자기 휘하의 직원이 업소로부터 뇌물을 먹었다거나 직장 내 성추행, 성희롱이 벌어졌다고 보고를 받았다면 어떡할까. 은폐와 축소, 피해자 회유 등이 먼저 떠오를 것이다. 연좌제가 갖는 부작용이다. 그래서 예방 교육을 잘하고 혹시 사건이 발생해도 절차에 따라 잘 처리하면 인사에 가점을 주거나, 아니면 최소한 불이익은 없애는 제도의 변경이 필요하다. 연대책임을 묻고 문책성 인사를 단행하는 부정적인 방식으로는 예방의 효과를 꾀하기 어렵다. 군대 내의 성범죄에 관한 한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할 긍정적인 제도 설계가 필요하다.


하태훈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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