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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감사 때가 되면 증인으로 채택된 대기업 총수들은 줄줄이 해외 출장을 간다. 불출석에 대한 벌금형은 1000만원 정도밖에 안 되니 별 부담도 안 된다. 생중계되는 국정감사 현장에서 곤욕을 치르는 것보다 그 정도의 벌금은 내고야 말지라는 생각이 드는 이유다. 서민들에게는 몇 달 치 월급이고 꽤 번다는 사람의 한 달 치 월급 정도이니 큰돈이지만 그들에게는 막말로 껌값이다. 현행 총액 벌금제가 갖는 맹점이다.

부자와 빈자의 1만원이 다르게 느껴질 텐데 같은 불법행위에 대한 벌금형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부과된다. 피고인의 재산 상태나 월 소득과 상관없다. 그래서 형식적·절대적 평등이지만 실질적·상대적 불평등이라는 지적을 받는다. 평균적 정의 관념에는 부합하지만 배분적 정의와는 거리가 멀다.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취급해야 정의롭다는 관점에서 보면 공정하지 못하다. 기본소득은 국가가 국민에게 주는 것이므로 부자와 빈자에게 차등 없이 동등해야 하지만, 형벌은 고통의 부과이므로 절대적 평등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 상대적 평등도 헌법의 평등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다.

재산(또는 소득)비례 벌금제가 등장하는 이유다. 정치인들 사이에 재산이냐, 소득이냐는 지엽적인 말다툼이 정쟁으로 번져 이념논쟁으로 변질하고 있지만, 총액 벌금제의 불공정성을 고쳐보자는 제안이다. 이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 나라들은 월수입 또는 일수입을 기준으로 하지만 재산 상태를 함께 고려해 하루 벌금 액수를 정한다. 그래서 소득비례 또는 재산비례 벌금제라고 부르는 것이다. 불법에 비례하는 일수(日數)를 정하고 피고인의 수입과 재산 상태를 고려한 하루 벌금 액수를 산정해 곱하면 벌금 총액이 산출된다. 피고인의 불법행위에 비례하는 일수는 누구에게나 동일하지만, 1일 벌금 액수가 다르므로 벌금 총액도 달라진다.

하루 수입이 1만원인 자와 10만원인 자가 똑같이 절도했다고 치자. 그들이 범한 절도의 불법에 상응하는 일수가 징역 2개월 정도에 해당한다면 60일이 되는 것이고, 전자는 60만원, 후자는 600만원의 벌금형이 선고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형벌이 주는 고통이 똑같게 와닿을 수 있다는 것이 재산비례 벌금제의 취지다. 일수벌금제라고 알려졌지만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으니 이렇게 부르자는 것이다. 일수 자체는 피고인이 누구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동일하기 때문에 불공정한 형벌이 아니다. 일수는 불법과 책임에 비례해 정해지므로 책임원칙에 어긋나지도 않고, 평등원칙에 위배되는 것도 아니다.

자유의 제한은 누구에게나 고통의 크기가 같다. 재벌총수의 징역 6개월과 노숙인의 징역 6개월은 똑같은 고통이다. 그러나 벌금형은 그렇지 않다. 형벌 감수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느끼는 형벌의 영향과 고통 정도를 형벌 감수성이라 한다면 벌금형은 재산이나 소득 수준에 따라 감수성이 천차만별이다. 없는 사람에게 벌금 100만원은 크나큰 고통이자 부담이지만 있는 사람에게는 별거 아니다. 범죄자는 공동체 또는 타인에게 해악을 끼쳤으므로 그에 대한 응분의 대가로서 국가가 고통과 해악이 본질인 형벌을 가한다. 범죄라는 부정에 대해 해악과 고통을 주는 형벌이라는 부정을 부과함으로써 법질서가 회복되어 정의가 살아난다. 벌금이 해악과 고통, 부담으로 와닿지 않으면 형벌의 맛을 잃게 된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1980년대 중반부터 싹텄고 1990년대 초반에는 개정 논의도 있었지만, 피고인의 재산 상태와 지불 능력 등을 조사하여 일수 벌금액을 산정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는 이유로 결실을 보지 못했다. 지금까지 드문드문 공론화와 입법 시도가 있었지만, 시기상조론과 평등권 위반 등 반론의 목소리가 커 도입이 좌절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국민연금이나 건강보험제도 등과 같은 소득 계측 장치가 갖춰져 있어 피고인의 소득과 재산 상태를 파악하는 데 어려움은 없다. 현재 벌금형에 대한 양형기준은 마련되어 있지 않은데, 재산비례 벌금제가 도입되면 벌금형의 양형도 합리화된다. 소위 황제 노역으로 불리는 환형유치의 문제도 해소된다. 벌금을 못 내면 노역장에 유치되는데 하루 벌금 액수가 미리 정해져 있으므로 얼마나 노역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벌금 미납으로 노역장에 유치할 때는 재산 상태를 고려하여 일당을 수억원으로 계산해 며칠만 살아도 벌금을 탕감해 주는 게 황제 노역의 문제다. 이렇듯 불공정한 벌금형을 개선해야 할 이유는 여럿이다. 전체 80%가 넘어 징역형보다 많은 벌금형이 공정해진다면 범죄예방 효과도 커질 것이다.

하태훈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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