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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그림자 일렁이는 우물에

작은 새가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간다

희미한 낮달도 얼굴 비쳐보다 간다


이제 아무도 두레박질을 하지 않는 우물을

하늘이 언제나 내려다본다

내가 들여다보면

나무 그림자와 안 보이는

새 그림자와 지워진 낮달이 나를 쳐다본다


흐르는 구름에 내 얼굴이 포개진다

옛날 두레박으로 길어 마시던 물맛이

괸 물을 흔들어 깨우기도 한다


이태수(1947~)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두레박이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맑고 차고 푸른 우물물을 길어 올리던 때가 있었다. 어릴 적에 가만히 들여다보면 수면에 내 작고 동그란 얼굴이 비치던 우물이다. 윤동주 시인이 시 ‘자화상’에서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다고 노래한 그 우물이다. 시인은 옛 우물에 나무 그림자와 작은 새의 그림자와 희미한 낮달이 비치던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 기억을 떠올리며 옛 우물을 들여다본다. 과거의 시간과 존재와 옛일이 수면에서 지금의 시인을 올려다본다. 나무 그림자와 새 그림자와 낮달도 시인을 쳐다본다. 우물은 거울과도 같다. 나의 내면을 비춰보는, 세계가 있는 그대로 비춰지는 물거울이기도 하다. 시인이 기억하는 옛 그 물맛이 우물의 고요함과 괴괴함을 흔들어 깨운다. 잠에서 깨어나듯 우물이 깨어난다.

<문태준 |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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