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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방에 앉아 침대 옆에 놓인 시집을 읽습니다

당신이 비운 집

한쪽에 놔둔 식물에 물을 주라 하였기에


아무도 모르게 누워도 봅니다

냉장고에 들어 있는

술 한 병 꺼내 마셔도 좋다 하였기에

술만 마실 수 없어 달걀 두 개를 삶습니다


아, 희미한 삶의 냄새

이 삶은 달걀을 어디에 칠까요

무엇에 부딪쳐 삶을 깨뜨릴까요


이병률(1967~)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집을 비운 사람의 방에 잠시 들른 사람이 있다. 집을 비운 사람과 그 집을 방문한 사람은 서로 일상에서 친하게 교유(交遊)하는 사이. 메마른 화분에 물을 줘달라는 부탁을 들어주러 가서 그이처럼, 그이가 읽던 시집을 읽고, 그이의 냉장고 문을 열어 먹을 것을 꺼내기도 한다. 그이가 되어본다. 그럴 때 시인은 책을 펼치고, 눕고, 혼자 먹는 이 일이 다름 아닌 삶의 희미한 냄새라는 생각을 문득 한다. 

그이가 매일매일을 사는 공간에서 우연히 그이가 되어봄으로써 그이의 생활과 마음 안쪽으로 들어가 보게도 된다. 그이 일상의 모래알 같은, 부서진 조각을 봄으로써 그이의 삶을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하게도 된다. 

우리는 누군가의 표정과 말씨와 작은 움직임 등을 읽음으로써 그이의 속마음을 알아챌 수 있다. 한 바가지의 물로 샘 전체의 물맛을 알 수 있는 것처럼.

<문태준 |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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