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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회화의 전통에서 누드란 궁극적으로 그것을 보는 남자의 성적 욕망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그려진 것이다. 그림 속 여자는 미리 잘 검토된 여성성을 구경거리로 제공하고 있다. 그림은 화가의 예술적 비전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소유한 자의 지위와 재산을 표현하고 그의 관음증적 욕망을 충족하는 차원에서 기능한다. 이처럼 유럽의 누드 예술형식에서 화가와 관객은 보통 남자이며 대상으로 취급받는 인물은 보통 여자다.
이런 불평등한 관계는 우리 문화에 아주 깊이 각인되어 있다. 마네는 이런 장르에 대해 질문을 던진 최초의 작가다. 그의 그림으로 인해 누드화의 이상은 깨졌다. 바로 ‘올랭피아’다.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있는 관자와 눈을 마주치고 있는 올랭피아는 실재하는 인간이고 완전 나체다. 여인의 다리 부분에는 흑인 하녀가 흰 종이에 싸인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서 있다. 당시 파리의 젊은 여성들 중에는 후원자들의 도움을 받아 생활하는 고급매춘부, 즉 ‘코르티잔’들이 많았고 그들의 일을 거드는 역할은 흑인여자들이 도맡았다고 전한다. 마네는 이런 당시의 현실을 그림 속에 반영한 것이다. 이 그림은 1865년 살롱전에 출품되었는데 전례가 없을 정도로 관객과 비평가들로부터 공격과 비난을 받았다. 신화가 아니고 현실 속의 여인을 나체로 그렸기 때문이다.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등 55개 예술단체 예술인들이 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박근혜 대통령 나체를 표현한 그림 ‘더러운 잠’ 훼손 사건을 비판하는 기자회견과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당시 서구미술에서 여성 누드를 표현할 때는 실제 모델이 아니라 미의 여신인 비너스나 사냥의 여신인 디아나 같은 여신들을 빗대어 이상화된 누드를 그리는 것이 관행이었다. 그러나 마네는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현실 속 여인의 벗은 모습을 전혀 미화하지 않은 채 그렸기에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던 것이다. 마네의 올랭피아는 신화 속의 누드, 이상화된 누드가 아니라 그냥 회화로서의 누드를 그렸고 그에 따라 회화는 신화나 종교적 담론의 기능에서 해방되었으며 지배계급의 지위와 욕망, 그들의 관음증을 제공하는 차원에서도 벗어나게 되었다. 또한 이 그림에서 배경의 깊이는 차단되어 있고 인체 묘사 역시 납작하게 칠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회화란 평면의 캔버스에 물감으로 이루어진 구성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서구전통회화가 추구해온 원근법과 눈속임을 기반으로 한 회화의 역사에 이의제기를 한 최초의 작품에 해당한다. 비로소 현대미술이 시작된 것이다.
지난 1월20일 국회 의원회관 1층 로비에서 ‘표현의 자유를 향한 예술가들의 풍자연대’가 주최한 ‘곧, BYE’전이 열렸다. 마네의 올랭피아를 패러디해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을 등장시킨 이구영의 작품 ‘더러운 잠’이 새누리당과 보수단체에 의해 격렬한 비판을 받고 결국 전시 중에 무자비하게 훼손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새누리당은 “풍자를 가장한 인격모독과 질 낮은 성희롱이 난무하고 있다. 표현의 자유를 빙자한 인격살인 행위에 다름없다”며 강하게 반발하고 이 전시를 주선한 표창훈 의원의 의원직 사퇴를 요구했다. 한 정치인은 “대통령을 소재로 한 여성비하”이며 “성폭력 수준”이라고도 했다. 더불어민주당은 표 의원에게 당직 정지 6개월의 징계를 내렸다. 그러나 정작 이 일에 대해 미술계의 의견은 철저히 무시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에 따라 미술작품을 자의적으로 재단하고 평하는 이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142년 전에 프랑스에서 일어난 사건이 현재 이곳에서 반복되고 있다는 것도 의아했고 외설, 예술의 논의가 오래전 종결된 것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도 새삼스러웠다. 오늘날 올랭피아는 모든 서양미술사 책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명화가 되었고, 현대미술을 태동시킨 중요 작품으로 인정된 지 오래다. 그리고 올랭피아를 통한 풍자와 패러디는 흔해 빠졌다. 더러운 잠과 같은 유형의 작품은 전 세계에서 무수하게 만들어지고 있다. 그것을 두고 성폭력, 여성혐오, 국격을 훼손한 작품이라는 등의 궤변으로 폄하하는 이들의 미술에 대한 인식에 놀랐고 더구나 민주와 진보를 표방한다는 더불어민주당 역시 표 의원에게 6개월의 당직 정지를 내렸다는 것에 더욱 놀랐다. 정치인들의 이런 저급한 문화와 예술에 대한 인식이 우리 현실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미술전문가가 배제된 상태에서 미술이 논의되고 재단되는 이 희한한 상황에 그저 말문이 막힐 뿐이다.
박영택 경기대 교수·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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