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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서 풍경 묘사는 언제나 심리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누군가의 시선에 포착된 풍경은 그 시선에 의해 새로이 부각되거나 부식되거나 하기 때문이다.
바람 한 점 없이 맑은 날 바다 앞에 선 이가 고요하고 잔잔한 바다를 가리켜 사납게 으르렁거린다 해도, 이와 반대로 폭풍우가 치는 날 바다 앞에 선 이가 숨 막힐 듯 고요하다 말한다 해도 기꺼이 동감할 수 있는 이유는 그이가 보는 바다가 그이의 내면이 그려낸 풍경임을 인정하기 때문일 것이다. 풍경은 내면의 연장이며 형상을 부여받은 내면이다.
풍경과 내면은 구분하기 힘들 만큼 뒤엉켜 선명하게 그려지는 경우도 있고, 완벽하게 무관한 것처럼 암시적으로 그려지는 경우도 있다. 전자의 유명한 예 가운데 하나는 플로베르가 <보바리 부인>에서 에마의 내면을 묘사하는 장면이다. “그녀의 삶은 마치 햇빛받이 창이 북쪽으로 나 있는 지붕 밑 골방처럼 냉랭했고 소리없는 거미와도 같은 권태가 그녀의 마음 구석구석의 그늘 속에 거미줄을 치고 있었다”에서 에마의 내면은 골방의 거미줄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2월 25일 열린 17차 범국민행동의날 집회에서 한 시민이 촛불을 켜고 있다. 강윤중 기자
후자의 유명한 예 가운데 하나는 헤밍웨이의 단편 ‘흰 코끼리 같은 언덕’의 다음과 같은 문장이다. “강 건너 저 멀리에 산들이 있었다. 구름 한 점이 그림자를 드리우며 곡식밭을 가로질러 지나고 있었고 아가씨는 나무 사이로 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 건너의 산, 구름 한 점이 떠가는 곡식밭, 나무 사이로 보이는 강 등은 인물의 시선과는 무관해 보이는, 순수하게 객관적인 풍경으로 비치지만 두 인물의 대화 도중 한 인물의 시선에 포착된 이 무심한 풍경이야말로 시선을 보낸 이의 내면이기도 하다. 상대방을 회피하기 위한 의도적인 머뭇거림이자 부드러운 질책이며 잠시 상대방을 잊어버린 자기몰입이기도 하다.
플로베르와 헤밍웨이는 풍경과 내면을 긴밀하게 엮었느냐 아니냐는 스타일의 차이는 있지만 풍경이 내면의 연장이며 형상을 부여받은 내면이라는 태도를 취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겨울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그날은 하루 종일 스산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나는 창가에 선 채 목탄화로 그린 듯한 바깥 풍경을 보고 있었다. 이 쓸쓸하고 막막한 풍경이야말로 어린 시절부터 내가 무척 좋아하던 풍경이었다. 해가 질 무렵 갑자기 사위가 어두워지면서 광야에 내던져진 기분이 들던 시간들, 차갑지는 않으나 질감이 느껴지는 근육질의 바람이 쉴 새 없이 불어오던 시간들, 장막이라도 쳐버린 듯 새까맣게 내리던 눈과 비의 시간들, 불길하게 새떼가 날아오르고 먹장구름이 순식간에 하늘을 점령해버리던….
그 시간들처럼 사위가 온통 잿빛으로 물들고 습한 공기를 호흡하며 불안에 떨어야 했던 그날 하루는 정말로 스산하기 짝이 없었다. 비가 내리는 어둑어둑한 세상 풍경에 마음이 끌리는 건 풍경이 내면의 반영이기 때문이며 나의 황량한 내면이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다는 기이함과 그 풍경이 생각처럼 추하기는커녕 아름답기까지 하다는 데서 오는 위로와 안도 때문일 것이다. 그러다 문득 이 풍경이 나의 내면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누군가의 내면이기도 하지 않던가.
그렇다면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이 쓸쓸한 풍경은 누구의 내면일까. 창가에 바투 붙어 커튼을 살짝 젖혀 밖을 내다보는 당신의 내면이 아니던가. 우산을 쓰고 가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비스듬히 젖혀 하늘을 올려다보는 당신의 내면이 아니던가. 버스 차창에 이마를 대고 우울한 눈으로 바깥을 내다보는 당신의 내면이 아니던가.
저기 광화문광장의 촛불도 누군가의 내면일 것이며 이런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자라면 그게 누구든 미래와 희망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싶다. 그 풍경은 내가 만들어 낸 것은 아니지만 내 안으로 들어와 버렸고 내면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므로 내면은 풍경의 연장이며 의미를 부여받은 풍경이기도 하다.
소설가 손홍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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